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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을 앞두고 외교 슈퍼위크가 막을 올리며 세계 외교의 좌표가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에게는 실용외교의 성패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재집권 후 첫 글로벌 시험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는 체제 안정의 명운이 걸린 자리다. 북핵·관세·공급망·‘경주 선언’까지, 한반도에서 세계가 맞부딪히는 외교전이 펼쳐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26일 말레이시아로 출국하며 ‘정상외교 슈퍼위크’의 막을 올렸다. 이번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정상회의를 시작으로 31일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까지, 한국은 20년 만에 세계 외교의 중심에 섰다.
이 대통령은 김혜경 여사와 함께 서울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올라 쿠알라룸푸르로 향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병기 원내대표, 강훈식 비서실장이 배웅에 나섰다. 이번 순방은 한·아세안,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를 거쳐 경주 APEC으로 이어지는 다자외교의 정점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첫 일정은 말레이시아 동포 간담회와 훈 마네 캄보디아 총리와의 정상회담이다. ‘온라인 스캠(사기) 범죄’ 공동 대응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 격상이 주요 의제다. 이 대통령은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일본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총리, 중국 리창 총리와 각각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이번 외교의 하이라이트는 29일부터 시작될 경주 APEC이다. 20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이번 회의에는 트럼프 대통령, 시진핑 주석, 다카이치 총리를 비롯한 21개 회원국 정상이 참석한다. 경주는 ‘세기의 외교 무대’로 변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현지 시간) 아시아 순방길에서 취재진에 “북한은 일종의 핵보유국(sort of a nuclear power)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의 공식 입장이 ‘비핵화’임을 고려할 때, 이는 외교적 실언을 넘어 일종의 메시지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원한다면 만나고 싶다”며 방한 중 ‘깜짝 회동’ 가능성도 내비쳤다.
대통령실은 즉각 “북핵 고도화의 현실을 언급한 것일 뿐, 핵보유국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외교가에서는 트럼프의 발언이 북·미 간 ‘단계적 비핵화’ 재논의의 신호탄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제시한 ‘E·N·D(동결–축소–폐기)’ 구상과도 맞닿아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4일(현지 시간) 독일 방문 중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북·미 대화의 물꼬를 트기 어렵다”며 김정은과 트럼프 양측의 결단을 촉구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도 “북측의 공식 반응은 없지만, 판문점 회동 재현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APEC의 핵심 무대는 30일 부산에서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이다. 트럼프와 시진핑이 한 테이블에 마주 앉는 것은 2019년 오사카 G20 회의 이후 6년 만이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KBS 인터뷰에서 “이번 APEC의 성패는 미·중 협의에 달려 있다”며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경주 선언’ 채택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미·중 정상회담의 의제는 단순한 무역 마찰이 아니라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두 강대국의 구조적 경쟁을 관리하는 데 있다. 미국은 공급망 안정과 시장 회복을 확보하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의약품 등 핵심 산업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리스크 축소(de-risking)’ 전략을 공식화할 계획이다. 반면 중국은 수출 통제와 관세 보복의 악순환을 완화하고 경기 둔화와 외국자본 이탈을 막기 위해 ‘패권 대결 완화’를 내세운다.
양국은 희토류·반도체 공급망, 펜타닐 확산 방지, 러시아산 원유 제재 등 전략 산업 전반을 협의할 전망이다. 희토류는 첨단 무기와 전기차의 핵심 소재로 세계 생산의 80%를 중국이 차지하는 만큼 협의의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에서는 미국이 ‘CHIPS법’의 기술 봉쇄를 유지하되 민간 기업 간 협력 채널을 일부 복원하는 절충안을 검토 중이다. 펜타닐 문제 역시 정치적 상징성이 큰 사안으로 재발 방지 메커니즘 구축이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번 회담은 ‘디커플링(탈동조)’이 아닌 ‘디리스킹(위험 완화)’의 틀 속에서 미·중이 경제적 경쟁의 속도와 강도를 관리할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첫 무대가 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미·중 고위급 무역회담이 열리고 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허리펑 중국 부총리가 이끄는 대표단이 경주 회담의 ‘전초전’을 이어가고 있다. 양국은 추가 관세와 수출 통제 등 상호 보복 조치로 대치한 끝에 이번 회담에서 ‘관세 휴전’과 ‘희토류 공급 재조정’의 틀을 마련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이번 협상을 통해 내수 둔화와 외자 이탈을 완화하고, 미국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하지 않는 ‘통제 가능한 경쟁’을 추구한다. 케빈 러드 주미 호주대사는 “미·중 관계는 싸움을 멈추려는 게 아니라 싸우는 법을 다시 짜는 과정”이라며 “이번 회담은 탈동조(decoupling)가 아닌 위험 축소(de-risking)를 상징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재명 정부는 이 격랑의 한가운데서 ‘실용외교’를 내세운다. 위성락 실장은 “미·중 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 희토류 공급망과 아시아 통상 구조에도 선순환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한국이 중재자이자 협력 플랫폼이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은 이번 APEC에서 미국과는 관세·투자 협상, 중국과는 공급망 및 비핵화 협력, 일본과는 셔틀외교 복원이라는 각기 다른 전략 목표를 병행한다. 한·미 회담에서는 3500억 달러 규모의 관세 패키지 협상이, 한·중 회담에서는 한한령(限韓令) 해제와 무비자 교류 확대가 논의될 예정이다.
한·일 회담은 이재명 정부의 균형외교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작동할지를 가늠하는 장이 될 전망이다. 보수 성향의 다카이치 총리와의 첫 대면에서 이 대통령은 과거사보다는 경제·안보 협력, 즉 ‘이념보다 실리’의 메시지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APEC 의장국으로서 이 대통령은 “한국은 강하고 실용적인 외교로 동북아의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29일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개막식에서 기조연설을 한 뒤,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을 국빈으로 맞아 한·미 정상회담을 진행한다. 이어 11월1일에는 시진핑 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한편 북·미 회동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연락하면 나는 100% 열려 있다”며 직접 회동 의지를 거듭 밝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시 최근 연설에서 “트럼프에 대한 개인적 좋은 기억이 있다”고 언급하며 여운을 남겼다.
외교가는 이번 경주 APEC을 ‘합의의 장’이 아니라 ‘위험을 관리하는 외교의 리허설’로 본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이번 회담은 결과보다 대화의 지속 자체가 중요하다”고 분석했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경주가 미·중 경제 분리의 속도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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