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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외교 무대의 하나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정상회의가 26일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개막했다. 28일까지 이어질 이번 정상회의는 동남아 정상들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아메리카·오세아니아·아프리카 대륙 주요국 정상까지 모인다. 참석자 정상 명단에 이재명(한국), 도널드 트럼프(미국), 리창(중국), 다카이치 사나에(일본), 앤서니 앨버니지(호주), 마크 카니(캐나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브라질), 시릴 라마포사(남아프리카공화국)가 올라 있다.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온라인(화상) 참석보다 이례적인 일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대신 2인자인 리창 총리가 온 점이다. 2012년 시진핑1기 때부터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따라 아세안의 중요도가 급부상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이미 8월부터 AP·로이터 등 주요 외신이 시진핑 집권 이래 애국주의를 내세운 대외 강경 기조가 중국의 국제적 고립과 경제 침체 악화를 자초했다는 내외 평가, 그로 인한 시진핑의 국내 입지 약화를 짚으며 이번 아세안 불참을 내다보고 있었다.
반면 이번 아세안 회의 최대 관심사는 2기 집권 이후 첫 아시아 순방인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됐다. 트럼프는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말레이시아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와 회담을 갖고 무역협상 타결을 발표하는데, 그 이상 중요한 게 이날 오전 태국과 캄보디아 간 평화협정 서명식을 안와르 총리와 함께 주재한 일이다. 아세안 정상회의를 배경으로 피스메이커로서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이벤트인 셈이다. 트럼프가 아세안과 태국·캄보디아 측에 평화협정 행사를 아세안 정상회담 기간에 열 것을 요청해 왔다고 알려져 있다.
7월 로이터와 홍콩 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트럼프가 갈등 당사자인 태국의 프롬탐 웨차야차이 및 캄보디아의 훈 마넷 등과 접촉하며 즉각적인 휴전협상을 가지도록 강력히 촉구한 온 점을 전한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무역협상이나 관세 문제를 거론하면서 양국이 충돌을 멈추지 않으면 대미 무역 등에서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 결과 이번 아세안 정상회의 직전 평화협정 서명과 트럼프의 서명식 증인 역할을 하기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고 14일 AP뉴스 등이 거듭 지적했다.
트럼프의 중재는 동남아 분쟁 해결 과정에서 미국의 ‘능동적 입장’을 천명한 신호로 해석될 수 있어 큰 외교 성과로 받아들여진다.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내부 메커니즘이 협상의 실질적 주축이었으며 중국 또한 드러나지 않게 개입했다고 분석된다 해도 이른바 ‘쿠알라룸푸르협정’ 서명식 현장에 미국 대통령이 등장해 외교적 책임 이미지를 확보한 점이 워싱턴포스트(WP)에서 강조됐다. 캄보디아 군대 철수, 지뢰 제거 등의 사전 조건 이행을 주장한 태국 정부도 트럼프의 역할은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한편 미·중 무역 대표단이 전날부터 27일까지 쿠알라룸푸르에서 고위급 무역협상을 진행한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허리펑 중국 부총리 등이 희토류 수출 제한과 대중 100% 신규 관세 부과가 맞붙은 상황 속에서 긴장 완화를 모색 중이다. 타협이 이뤄지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열리는 한국에서 트럼프·시진핑이 6년여 만의 정상회담을 가지게 된다. 정적 탄압을 이유로 50%의 관세 부과가 선언된 브라질과의 관계 개선 여부도 주목된다. 전날 대통령 전용기에서 트럼프는 룰라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관세 인하 고려 가능성을 언급했다.
미·중 무역전쟁 사이에 낀 아세안은 이번 회의를 통해 미국의 무역 압박을 상쇄하고자 다른 주요 경제체와의 통상 협력 강화에 힘쓸 방침이다. 그 주요 무대가 27일 개최되는 아세안과 한·중·일+호주·뉴질랜드로 된 거대 다자 자유무역협정(FTA)이자, 중국이 주도해 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다. 2020년 이후 처음 재개된 RCEP 정상회의, 아세안과 동북아3국·인도·오세아니아2국 등 6개 나라가 비(非)회원국 멤버로 가세한 동아시아정상회의(EAS)로 이어진다. 2011년부터 EAS에 함께한 미국·러시아은 국무장관이나 부총리급이 참석하곤 했다. 금년의 경우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노박 부총리가 왔다.
1967년 5개(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필리핀·태국) 창립국으로 출범한 아세안의 발전적 위상에 결정적 그늘을 드리운 것은 최근 불거진 캄보디아·미얀마 등지의 범죄단지(사기 작업장) 문제다. 이들 지역에 기반한 다국적 조직 범죄 면모가 전 세계 매스컴을 탄 터에 동남아 복판에서 대형 국제정치의 장이 열렸으니 더더욱 피해가기 어렵다. 이 국제적 범죄 네트워크 배후가 중국인 세력이라는 점이 시진핑 주석의 참석을 곤혹스럽게 만든 이유의 하나로 풀이되기도 한다. 한국과 미국 등 각국 정부가 이들 지역의 사기 조직들을 제재·단속하며 관련국 정부에 단속 강화를 압박하고 있다. 아세안 역시 이번에 공동성명 등으로 입장 표명이 있을 전망이다.
남중국해 충돌 방지를 위한 행동강령 마련 협상과 미얀마 내전 문제도 논의될 2025 아세안은 11번째 회원국을 맞이하게 됐다. 2002년 독립해 2011년 가입을 신청한 동티모르다. 일본·호주·뉴질랜드(1977년)과 한국(1991년)이 비회원국으로 참여한 이후 아세안은 본행사 외 점차 다양한 외교적 노력의 기회가 됐다. 2005년엔 아세안 10개 회원국 외에 6개국(일·중·한·인·호·뉴)이 주요 멤버로 자리 잡았다. 이들이 EAS를 구성해 매년 아세안 본회의 직후 얼굴을 마주하면서 아세안 시즌은 5대양6대주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외교의 계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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