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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치러진 아르헨티나 선거에서 집권 여당 ‘자유전진당(LLA)’이 압승을 거뒀다. 하원의원 127명(전체 257명 중 약 절반)과 상원의원 24명(전체 72명 중 3분의 1)을 다시 뽑는 선거였다. 대통령 선거와 총선·지방선거가 엇갈린 주기로 인해 사실상 ‘현 정권 평가’ 역할을 하는 한국과 달리, 아르헨티나의 경우 미국과 동일한 중간선거 틀을 가졌다. 대통령 4년 임기 중 2년 차에 의석 일부 교체를 위한 선거를 맞게끔 돼 있다.
27일(현지 시간) 전 세계 주요 외신들은 아르헨티나 여당 LLA가 하원에서 개혁 법안 저지선을 넘어 사실상 단독 입법 가능한 세력을 확보했다고 전했다. 상원 역시 유의미한 의석을 추가해 내각 안정성과 정책 실행력이 크게 강화됐다는 소식이다. 만일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면 곧장 하비에르 밀레이 정권 ‘레임덕’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20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선 밀레이의 중간선거 패배가 초래할 개혁 중단과 대통령 탄핵 리스크을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선거의 외교적 함의도 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엑스(X) 계정을 통해 “아르헨티나는 위대하게 다시 성장할 것”이라며 밀레이를 공개 지지하면서 “(이번 선거) 패배한다면 미국의 인내심도 끝날 것”이라고 해 눈길을 끌었다. 뉴욕타임스(NYT) 등에선 트럼프 행정부의 200억 달러 통화스와프 제공, 21억 달러 페소 직접 매입 등 전례 없는 금융 지원을 이번 밀레이 측 압승의 배경으로 꼽았다. 그 연장선에서 나온 경고의 목소리도 있다. 정치사회학자 마리아나 로페스 카톨릭대 교수가 26일 현지 매체 라나시온에 “외부 자금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주권의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정치적 동력을 확보한 밀레이정부는 개혁 2단계에 진입할 전망이다. 이미 선거 승리 직후 노동시장 유연화, 공공부문 구조조정 심화, 민영화 대상 확대 등이 대통령실 발표로 예고됐다. 단기적 고통은 불가피하겠지만 중장기적 경제 체질·투자환경 개선을 내다보게 한 내용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 오귀스틴 살라사르 교수가 투표 이튿날 대학 세미나에서 “여당 압승으로 시장 신뢰 회복의 핵심 조건이 확보됐다. 이제 개혁 지속 여부는 정책 완성도라기보다 국민 인내심에 달렸다”고 한 발언이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정치사 문맥에서 ‘개혁’이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우선시한 기조의 회복 방향성을 뜻한다. 이번 선거는 2023년 12월 취임한 밀레이가 개혁을 계속 추진할 수 있게 되느냐 마느냐의 분수령이었다. 여당의 승리로 개혁에 가속이 붙을 전망이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수십 년간 포퓰리즘 경제정책의 후폭풍에 시달려 왔다. 20세기 초 1인당 GDP 세계 10위권에 들던 나라였으나 1946년 후안 페론 집권 이후 보조금 의존과 공공부문 비대화, 보호무역 중심의 정책이 지속되며 재정수지가 심각하게 악화됐다.
아르헨티나의 1989년 2001년 두 차례 기록적 인플레이션(3000~2만%)은 유명하다. 1958년부터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까지 23회에 걸쳐 1770억 달러(240조 원)를 지원받았다. 가장 최근 것이 금년 4월의 20억 달러(2조8000억 원)였으며 역대 단일 최고액은 2018년의 570억 달러(77조 원)였다.
엄청난 자원의 축복을 받은 국가가 ‘퍼주기’형 포퓰리즘으로 철저히 망가진 대표 사례가 아르헨티나다. 오늘날 그런 나라의 상징이 된 베네수엘라에 비해 아르헨티나는 훨씬 긴 포퓰리즘 역사를 가졌으며 그런 만큼 이를 청산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보여준다. 이번 선거 결과를 27일 현지 일간 부에노스아리레스헤럴드에선 “고통스럽더라도 포퓰리즘 청산을 선택한 국민의 의지를 말해 준다”고 짚었다.
극단적 긴축 및 규제 철폐를 내세운 밀레이의 개혁은 과거 역사의 뼈아픈 처험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라고 21일 뉴욕타임스가 지적했다. 취임 직후 밀레이는 공공요금 보조금 50% 이상 삭감, 국립대 및 공공의료 예산 축소, 연금 개편, 국영기업 민영화 추진 등 충격 요법을 단행했다(작년 3월 아르헨 경제부 브리핑).
특히 중앙은행 폐지와 페소 폐기 및 달러화 추진 정책이 의심어린 세계적 주목을 받았음을 지난달 FT가 돌아보기도 했다. 이달 발표된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 자료엔 연간 물가상승률이 250%대에서 170~180%대로 떨어졌다. 25일 블룸버그는 밀레이의 개혁에 대한 기대감 속에 외환시장 불안이 완화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증시가 올해 들어 20% 이상 반등한 사실을 강조했다. 미국 및 국제금융기관이 밀레이 개혁을 긍정 평가하면서 외국자본 유입 재개 기운 또한 상승 중이다.
다만 개혁 과정의 고통은 녹록지 않다. 국립 라플라타대 연구에 따르면 밀레이 취임 첫 1년 사이 실질임금은 20% 이상 감소했고 2022년 40%에 이른 아르헨티나 빈곤율이 한때 약 53%까지 갔다가 작년 하반기부터 38%로 떨어진 이후 하락 중이다. 식료품 가격 부담이 쉽게 줄지 않아 중산·서민층 불만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성과가 보이긴 하지만 경제 회복의 과실이 아직 대다수 국민에게 도달하지 않았다”는 라플라타대 로드리고 카스티요 교수 논평(22일자 ‘엘 크로니스타’)에 현 상황의 총괄을 읽을 수 있다.
FT에선 “이번 압승이 오히려 포퓰리즘 부활을 앞당길 가능성”을 우려한 일부 전문가들 시각을 인용해 개혁 정당성 유지를 위한 ‘성장 기반 확충’과 ‘사회안전망 보완’ 병행 필요성을 일깨웠다. 국제사회는 이번 선거 결과를 아르헨티나의 자력 회복 가능성을 가르는 시험대로 평가한다. 경제 회복의 초기 신호가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국민 체감은 미진하다. ‘고통 뒤 회복’을 내건 약속이 실현될지 새 갈등의 불씨가 될지는 아르헨티나인 스스로 답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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