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5] 무등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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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15 06:20:35

류동운이 사수하려 했던 전남 도청과 도청 주변에서 가장 높다는 전일빌딩의 총격전 흔적을 보고 난 후 태주와 승연은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금남로로 갔다. 식당을 나와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한 시간이라도 빠른 차편이 있으면 바꾸겠다, 했다.

기차역에 도착한 태주는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승연의 손을 꽉 잡았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승연에게 돌아가자고 했다. 영문을 묻자 사복 경찰이 깔렸다고 했다. 아무리 봐도 경찰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 알아요? 보면 알지. 아까 금남로에도 깔렸었어. 검문을 피해야 하니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잠시 몸을 숨기자. 괜찮지? 이따가 원래 떠나려 했던 시각에 다시 오자. 태주는 번화가를 피해 한적한 곳에 있다가 어스름이 내리면 역으로 다시 오자고 했다. 승연은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허름한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자 역으로 이동했다. 아침 일찍 나온 데다 종일 걷기만 해서 피곤할 대로 피곤해진 승연은 더 쉬자는 말도 못 하고 묵묵히 따라나섰다. 버스에서 내리려던 태주가 멈칫했다. 그는 버스 뒤쪽으로 이동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아까보다 더 많네.

태주는 승연에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승연 혼자 서울로 올라가는 방법과 하루 자고 서울로 가는 방법. 승연은 태주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하, 친절도 하셔라. 새벽부터 나오라 하곤 아무 말 없이 망월동 묘지 구경시켜 주더니 짭새들 깔렸으니 혼자 가라고요? 선배는 류 선배 어떤 점에 감동해 매년 이곳까지 온 거예요? 보여줄 거 다 보여주고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내 머릿속에 개념 심어 주곤 혼자 가라?”

태주는 승연의 반발에 당황했다. 돌려보내는 방법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걱정하잖아, 차표도 끊어 놨고….”

허름한 간판의 무등여관은 깨끗했다. 보료가 깔린 특실이었다. 미리 불을 때 놓았는지 방은 온기로 가득했다. 입구 오른쪽 조그만 화장실엔 세면대와 커튼이 드리워진 샤워 공간이 있었다. 물을 트니 뜨거운 온수가 콸콸 쏟아졌다. 태주는 전화로 이부자리를 한 채 더 갖다달라고 말하고는 담배 피우고 올 테니 쉬고 있으라 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마친 승연이 욕실 밖으로 나오자 방 한가운데 이부자리 한 채가 놓여 있었다. 태주는 보료 위에 이불을 깔아 주었다. 이불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어색한 침묵이 차가운 방 공기를 더욱 냉랭하게 만들었다.

태주가 수건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간 사이 승연은 가방을 뒤져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서울 집으로 전화할까 하다가 말았다. 내려올 때 행여 당일에 못 올라오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처음 외박인 데다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는 생각에 가슴이 갑갑하고 두근거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주는 승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해 어색한 침묵을 이어 갔다. 음료수라곤 달랑 따뜻한 보리차가 담긴 물 주전자뿐이었다. 태주가 일찍 자고 아침 차로 서울 가자며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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