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쓰는 역사 [037] 일본 덴메이 대기근 상징이 된 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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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특성의 식물

스카이데일리 기자페이지 + 입력 2024-11-18 09:10:29

▲ 석산은 ‘돌마늘’이라는 뜻으로 비늘줄기의 외형이 마늘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윤상구 사진작가

금지된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언제나 애틋하다. 그래서인지 ‘상사화’라는 이름을 지닌 꽃은 한 번 더 돌아보게 된다. 뭔가 사연을 담고 있을 듯하기 때문이다.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특성 때문인 듯하다. 석산에도 그런 특성이 있어서인지 상사화와 곧잘 혼동된다. 심지어 ‘상사화 축제’가 열린다는 곳에 가보면 석산 꽃이 잔뜩 피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석산과 상사화는 분명히 다른 식물이다. 구별하는 방법도 어렵지 않다. 상사화는 잎이 먼저 난 뒤 꽃대가 돋아나고 꽃이 피는데 석산은 꽃이 진 후 잎이 돋아난다. 꽃 색도 상사화에는 연한 보랏빛이 돌고 석산 꽃은 짙은 붉은색이다.

석산·돌마늘·꽃무릇 등 다양하게 호명

석산(石蒜)을 한자 그대로 풀면 ‘돌마늘’이다. 석산은 구근 식물로, 비늘줄기의 외형이 마늘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석산·돌마늘·꽃무릇 정도가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불리는 이름이다.

꽃 색깔이 피처럼 붉고 비늘줄기에 독성이 있어서인지 일본에서는 피안화라는, 죽음을 연상케 하는 이름으로도 일컬어진다. ‘피안(彼岸)’이란 강 건너편 언덕을 말하는데 그 강은 한 번 건너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그래서 피안은 저승을 뜻한다. 그와 관련하여 사인화(死人花)·장례화·유령화·지옥화·저승화 등 다양한 별명이 있다.

석산 비늘줄기에는 알칼로이드가 많이 포함되어 있어 잘못 먹으면 구역질이나 설사를 일으키고 심한 경우 중추신경 마비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런데 물에 삶거나 데쳐서 이 성분을 제거하면 질 좋은 녹말을 얻을 수 있다. 한방에서는 해열·거담·통증 완화제로 사용되었고 구황 식물로 쓰이기도 했다.

일본 덴메이[天明] 대기근은 에도 시대이던 1782~1788년 덴메이 천황 시절에 일어난, 일본 근세사상 최대의 기근 사태였다. 이때 석산을 캐어 식량으로 삼았기에 석산은 덴메이 대기근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석산도 모두 동이 나고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덴메이 대기근 때 식량이 된 석산

대기근을 불러온 결정적 계기는 1783년 일어난, 아오모리 현 이와키산과 아사마산의 화산 활동이었다. 이 화산들이 분화하여 화산재가 쏟아져 내렸고 이 때문에 일조량이 줄어들어 농작물은 치명적 냉해를 입었다.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는데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특히 심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쿠가와 바쿠후는 검약과 긴축 정책을 중심으로 한 개혁을 단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곡물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기근과 사회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기근이 휩쓴 6년 동안 어느 번에서는 아사자 4만850명에 병사자 2만3848명이 발생했고 가족 전멸로 폐허가 된 집은 10만 채가 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처벌이 두려워 피해 규모를 축소한 지역도 있다고 하니 피해 숫자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황폐해진 농지를 버리고 유랑민이 되었고 역병까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100만 명 가깝게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조선통신사 파견을 중단시킨 대기근

석산뿐이겠는가.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온갖 생물을 다 먹어 없앴고 종이까지 먹어서 절의 경전이 남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면 반드시 등장하는 괴담이 있다. 바로 식인(食人)에 대한 얘기다. 이런 경우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건 그나마 눈감아줄 수 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산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 대기근은 당시 조선과도 관련이 있다. 1655년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쇼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는 이후 쇼군이 바뀔 때마다 보내는 것으로 정례화되었다. 그런데 대기근 때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기근 때문에 손님을 맞기 곤란하니 통신사 방문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통신사는 25년 동안 파견되지 않았고 1811년 에도가 아닌 쓰시마[對馬島]까지만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파견한 것이 마지막 통신사가 되었다.

일본에는 ‘석산 꽃을 꺾거나 집에 가져가면 불이 난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꽃의 생김새가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데다 독이 있는 식물이라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속설인 듯하다. 이래저래 석산은 불길하고 꺼림칙한 꽃으로 여겨졌다.

정열적인 붉은 빛의 화려한 꽃을 보여주고 다급할 때 먹을 것이 되어주는 석산을 기피하는 진짜 이유는 뭘까? 독성보다는 기억하기 싫은 고통을 석산이 일깨우기 때문 아닐까? 그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석산은 그저 아름다운 꽃일 뿐이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사람에게 석산은 대기근의 상징이고 더 나아가 식인의 기억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 석산은 잔인한 꽃인 셈이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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