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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낙조를 대하곤 했다. 학원이 필수가 아니던 시절이라 귀가길은 항상 느긋했고 걷는 게 취미이다 보니 노을이 진 하늘을 자주 대했다. 한낮의 태양은 모습도 색도 알 수 없지만 저녁 무렵의 태양은 달랐다. 동그랗고 붉은 해가 주변을 화려하게 물들이며 하루의 임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중이었다.
소녀의 눈에 담긴 태양의 귀갓길은 웅장하고 비장했다. 속도는 왜 그리 빠른지! 태양의 은퇴식에 마음을 빼앗긴 채 응시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태양은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의 해무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곤 했다. 이제 할 일 다했으니 퇴근길을 재촉한 걸까. 태양도 퇴근 시간을 기다렸나 보다.
게으른 나는 평생 해돋이를 본 게 몇 번 안된다. 하지만 해넘이는 많이 접했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인생도 노년이 아름다울 거라고! 겨우 열예닐곱 된 소녀가 화려하고 멋진 인생의 노년을 기대하고 살았나 보다.
어느덧 중년에서 노년으로 인생 환절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게 웬일인가! 소녀 시절의 환상은 무참히 깨어지고 어떻게든 중천의 태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닌가 보다. SNS를 기웃거려 보면 알 수 있는데 중년의 소망 대부분은 회춘(回春)이다. 칼바람에 잎이 지고 열매를 떨구어야 하는 가을은 반갑지 않다. 그래서 뇌와 정신의 노화를 막는 법, 장기의 질병을 늦추는 법, 피부를 청춘으로 되돌리는 법 등 수많은 비법과 파이팅이 난무한다.
한동안 이 방식에 동조했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누가 흰머리를 아름답다 하겠으며 곳곳에 새겨진 주름을 반가워하겠는가. 옛사람들도 늙음을, 가을과 겨울을 어떻게든 막아 보고 싶어했다. 봄과 여름이 주는 희망과 여리여리함, 분주함과 풍성함을 떠올려보면 어떻게든 계절의 궤도를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다.
가을은 참으로 지난하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환절기는 만만치 않다. 결실을 맺고 끊어 내고 다시 혼자가 되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무들도 그렇겠지만 인간인 우리도 힘들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거센 바람이 불다가 잔잔하고 화창한 날이 오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겨울이 천천히 오겠지? 아냐, 이번 겨울은 따뜻해서 봄 같을 거야.”
왜 우리는 가을이라는 환절기가 힘들까. 인생의 가을이 지닌 무게가 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의 봄과 여름에는 무성한 가지와 열매를 위해 땀 흘리지만, 가을이 되면 그것을 거두고 안으로 수렴해야 한다.” 심리학자 칼 융이 한 말이다. 가을부터 마무리를 하라는 뜻이다. 태양도 매일 마무리를 한다. 아침부터 낮까지 애정어린 관심을 주었던 지구이지만 이 땅을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모습을 감춘다. 소녀의 찬탄과 경의를 뒤로 하고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떠난다.
우리도 그렇다. 때가 되면 가졌던 것들을 내려놓고 어떤 때는 자기 몸과 마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놓아 두고 마무리를 해야 한다. 융은 ‘인생의 가을’을 이야기하면서 ‘개성화(Individuation)’의 계절이라고 했다. 개성화란 ‘자기(Self)가 되는 과정’이다. 가을은 이제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내면의 세계를 통합해 진정한 나로 완성되어 가는 계절이다.
"우리는 아무 준비 없이 인생의 오후로 들어서는데,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은 (인생의) 아침에 쓰던 진리와 이상이 여전히 통할 거라 믿는 것이다."
융의 이 말은 가을로 접어드는 인생 환절기를 곱씹게 한다. 이제 어떻게 나 자신과 화해할 것인가, 어떻게 두려움없이 인생을 마주하여 마무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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