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은 가족을 떠올리는 때이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건 추석과 설은 돌아오고 우리는 혈연을 따라 옹기종기 모인다. 이날은 육신을 지니지 않은 조상도 초대된다. 그래서 거의 5세대가 호흡을 함께하는 시간이 명절이다. 지인 한 분은 4형제의 막내이다. 4형제의 다음 세대는 자신의 자녀와 조카를 포함해서 총 10명이다. 그분이 한때 탄식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큰 집 조카들이 결혼을 안한 아이가 많아요. 셋만 결혼했는데 아이를 잘 낳지 않으니 모두 해서 손녀 둘이고 이제 집안에 대가 끊기게 생겼습니다.” 그분은 명문가의 후손이고 지금도 고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딱히 위로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활기찬 음성으로 전화를 하셨다. “우리 며느리가 딸을 낳았어요. 그런데 아들도 꼭 낳아준다고 합니다. 욕심 같아서는 아들 넷을 낳아주면 형님들 집안에도 대를 잇게 해드리고 싶어요!” 손녀를 보신 것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고 정말 착한 며느님을 두셨다고 말씀드렸다. 요즘 세상에 아이 하나 낳는 것도 힘든데 시아버지가 원하는 아들도 낳는다고 했으니 보통 며느님은 아니다. 부모님이 얼마나 애지중지하시겠는가! 손자 넷에 관한 지인의 말은 그저 희망사항이니 함께 웃어 넘겼다. 손자 구경하기 힘든 세태에 손자를 두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2024년 한국의 출산율은 0.68명이었다. 가족당 채 한 명도 안된다. 미국의 과거가 떠오른다. 미국은 1957년 가족당 3.80명이었던 출생률이 20년 후인 1977년에 2.04명으로 급감했다. 그동안 이혼율이 2배 증가하고 여성가장 가정이 33% 늘어났다. 초등학생 세 명 가운데 한 명꼴로 편부나 편모 또는 친척과 살고 있었다. 취학 아동 절반 이상의 어머니들은 직장을 다녔으니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맞벌이 부모를 돕고 있었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현관문 열쇠를 목에 걸고 혼자서 생활했다. 당시의 미국 가정은 현재 한국 가정의 모습과 유사하다.
과학과 정보 기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받는 것 중 하나가 ‘가족’이다. 안 그래도 가족 자체가 취약해지는데 가족 노릇을 해 줄 인공지능(AI)까지 나오다 보니 가족의 존폐에 대한 논의도 분분하다. 한국의 대가족과 확대가족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요즘은 핵가족도 해체되는 중이다.
3~4명밖에 안되는 핵가족이 이런저런 이유로 뿔뿔이 흩어져서 사는 1인 가족의 시대이다. 젊은이들 또한 결혼보다는 동거를 택한다. 가족이나 가정이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이는 후순위 선택지이며 아이 대신 반려동물을 기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혈연을 나눈 가족은 인류의 유전자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확대가족이든 핵가족이든 간에 가족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회를 거쳐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이어져 왔다. 미국의 노예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기에 강아지를 분양하듯 매매되면서 피를 나눈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친자 관계 또한 법으로 전혀 보호되지 않았다. 백인사회는 흑인 노예의 가족과 친족 가치를 의도적으로 훼손했다. 그 속에서도 그들은 친족집단을 유지했다. 아이들에게 가족의 성을 물려주었고 근친상간의 금기를 철저하게 지켰다. 노예들의 친족관계는 주인 몰래 남부 전체에 퍼져 있었다. 결국 그들은 노예해방 후 혼인신고를 했다.
1960~70년대에 미국의 공동체 중에는 아이들을 탁아소에서 기르면서 평등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집단이 있었다. 그런데 이 평등주의 공동체에 속한 어머니들 중 3분의 1은 이후 자신이 자녀를 돌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공동양육에서 부모양육으로 돌아섰다. 1940~50년대 이스라엘 키부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가족을 이루려는 인간의 성향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연방 여성교도소의 재소자들은 가족과 유사한 단위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로 각각의 쌍을 이루었고 형제자매도 있고 어머니·아버지·삼촌·숙모·할머니·아버지도 두었다. 연령과 성향에 따라 역할이 정해진 이 가족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을 보호하고 음식을 챙겨주고 서로 아끼고 도왔다. 학자들은 이 공동체를 ‘교도소 의사가족(pseudofamily)’이라고 명명했다. 한국영화 ‘가족의 탄생’(2006)도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설 명절은 오랜만에 대가족이 모이는 기간이다. 서로의 얼굴과 음성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고 가족이 무엇인지 혈연이 무엇인지 느끼면서 정다운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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