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밀’과 ‘사회계약설’ 출간 후 루소는 극적인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이 위대한 작품들은 한편으론 그의 명성을 꽃 피게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반복적으로 추방당하는 도망 작가로 만들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루소는 망명지를 찾아 헤맸다. 그때 바다 건너에서 데이비드 흄이 영국으로 오라고 손짓했고, 프로이센에서도 망명을 허락했다. 루소는 프로이센을 최종 선택했다.
1762년 7월10일 모티에르에 도착한 루소는 아름다운 계곡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이 행복도 잠깐이었다. 마을 개신교 목사 몽몰랭(Montmollin)은 루소에게 심한 적대감을 드러냈고 동네 사람들도 덩달아 이 철학자의 집에 돌을 던지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잔인하게 쫓겨난 루소는 결국 그해 9월 초 비엔(Bienne) 호수가 있는 생-피에르 섬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거기서 3년여 세월을 보냈다.
흄은 영국에서 계속 러브콜을 보냈다. 루소는 이를 받아들여 1766년 1월4일 영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들의 밀월은 오래 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흄이 루소를 영국으로 망명시킨 배경에는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루소의 팬인 영국 귀족부인 부플레르와 룩셈부르크의 요청이 그것이었다. 또한 흄이 루소에게 제안한 영국 국왕의 연금도 사실 정치적
흄은 영국 국왕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이 일을 추진했고, 영국 국왕은 불우한 프랑스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했다. 이를 안 루소는 국왕의 연금을 단호히 거절했다. 두 철학자의 관계는 극도로 나빠졌고 큰 다툼까지 벌어졌다. 흄은 이를 서신으로 재빨리 퍼뜨렸다. 이를 여러 신문에서 ‘루소와 흄의 사건’으로 대서특필했고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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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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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월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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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 등 당대의 굵직한 인물들이 플레이어로 끼어들어 진흙탕 싸움이 돼 갔다. 흄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 갔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생활은 경제적으로 루소에게 큰 부담이 됐다. 어려움을 헤쳐나가기 위해 그는 필경사 일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귀국 후 떠안게 된 빚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빈털터리가 된 루소는 대중의 관대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지라르댕(René de Girardin) 후작이 에르메농빌(Ermenonville)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오라고 손짓했다. 예술과 문학 애호가인 지라르댕은 음악 파티를 도와달라는 구실로 루소를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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