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김일성은 누구인가
북한의 김일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이며 1912년 4월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조작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증조부 김응우(金膺禹)와 조부 김보현(金輔鉉)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 김형직(金亨稷·1894년생)은 신식 교육을 받았고 평양에서 숭실중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김형직은 집안이 어려워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지방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1918년에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1919년 5월에 다시 만주 임강현 모아산(臨江縣 帽兒山)으로 이주하여 한의원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후에 다시 장백현 8도구 (長白縣 八道溝)로 이주하여 한의원을 개업하고, 고향 외가에 맡겼던 아들 성주를 데려다가 팔도구소학교(八道溝小學校)에 넣었는데 1923년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를 다시 고향에 보내 외가 마을에 있는 창덕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리고 1925년 봄에 성주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때 김형직은 장백현(長白縣) 일대에서 유력한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장백현 서쪽에 있는 무송(撫松)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백산무사단 (白山武士團)’에 가입해 독립운동가들이 병이 나면 열심히 한약을 지어 주었다.
마골단 대원이 된 김성주
1926년에 성주는 무송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화전현(樺甸縣)에 있는 화전의숙에 입학했는데 아버지 김형직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학교를 또 그만두어야 했다. 김형직은 32세이던 1926년 여름,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때 김형직의 처 강반석(康盤石·당시 34세)은 세 아들 성주(聖柱·14세)·철주(哲柱·10세)·영주(英柱·4세)를 데리고 무송에서 한동안을 지냈다. 그러다가 성주는 그 무렵에 무송 일대를 횡행하던 마골단(馬骨團)이란 공산 폭력배의 무리에 끼게 되었다.
당시는 공산주의의 열풍이 그 지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마골단은 십대 한인 깡패조직으로 혁명 운동을 한답시고 중국인·한인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부유한 집을 털며 협조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라고 때려눕혔다. 그러자 한인 자치기관이었던 정의부(正義府)에서 이종락(李鍾洛) 소대를 보내 마골단을 와해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소년 성주는 붙잡혔다.
정의부에서는 김성주가 정의부 소속 백산무사단으로 신망이 있었던 김형직의 아들인 것을 알고 죄를 용서해 주었다. 그리고 이종락에게 그를 훈육하도록 했다. 1927년 봄에 이종락은 성주를 봉천(奉天)에 있는 중국인 학교인 평단중학교(平旦中學校)에 입학시켜 주었다.


하지만 평단중학교에서도 김성주는 마골단 기질 때문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당했다. 이후 김성주는 무송으로 돌아갔고 그의 가족은 또 안도(安圖)로 이사를 했다. 안도에서는 중국인 경찰대장의 도움으로 1928년 봄에 길림의 중국인 학교인 육문중학교(毓文中學校)에 들어갔다. 당시 길림에는 많은 한인이 살고 있었는데 소년들은 ‘조선인 길림소년회’에 가입하도록 되어 있어 김성주도 이 모임에 가입하고 얼마 후 회장이 되었다. 이 무렵 공산주의자들은 활발하게 조직 확장 운동을 벌이며 농민과 청년·학생들에게 접근했다.
공산주의에 물들기 시작한 김성주
1929년에 17세가 된 김성주에게도 그 손이 뻗쳐 와 그해 5월 초에 ‘고려공산청년회’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본의 길림 총영사관 경찰대에 의해 가담자 거의 전부가 검거되었는데 이때 김성주는 무사히 길림을 빠져나가 자신을 돌봐 주었던 이종락을 찾아갔다. 그때 이종락은 마골단을 토벌하던 정의부나 국민부 소속의 민족진영이 아니라 변절하여 공산주의 활동에 이미 깊숙이 빠져 있었다. 이종락은 찾아온 김성주를 자기 부대의 대원으로 삼았다.
당시 이종락은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에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이란 것을 조직하여 인근의 한인 농촌으로 파고들기 시작했고 1929년 가을부터는 오가자(五家子) 지방까지 손을 뻗쳤다. 이종락 부대의 약 50명 대원들은 권총을 차고 다니며 농촌에 들어가 소득의 10%를 길흑농민동맹에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김성주도 오가자에 파견되어 세금 징수와 반동분자 색출 활동을 하며 설치고 다녔다.
그리고 이때부터 김성주는 당시 모든 조선인에게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던 소련 극동지역의 김일성(본명 김광서(金光瑞)·별호 김경천(金擎天)) 장군의 이름을 따서 자기도 ‘김일성’이란 별호를 쓰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후에 이 김일성(본명 김성주)을 동북항일연군 제6사단장을 지낸 김일성·제2방면군장을 지낸 김일성 또는 진짜 애국 투사였던 시베리아의 김일성(본명 김광서) 장군과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1930년 말에 길흑농민동맹에 대한 검거가 시작돼 이종락이 체포당하자 김성주는 오가자를 떠났다. 그때 그는 봉천의 평단중학교 때 중국인 친구였던 장아청(張亞靑)과 같이 아청의 고향인 무송으로 갔다. 1931·32년경에 김성주와 장아청은 또래의 젊은 애들을 규합해 공산 혁명을 위한 군자금을 모은다는 명분으로 돈 있는 중국 사람들 집을 털고 다녔다. 덕분에 무송에서는 “조선 놈 김일성 일당의 약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끓었다.
1931년 9월18일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는 일본군에 저항하기 위한 두 개의 한인 민족주의 무장부대가 있었는데 하나는 북만주의 한국독립군이고 다른 하나는 남만주의 조선혁명군이었다.
남만주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김일성(김성주) 일당이 약탈 행위로 주민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을 듣고 예하 부대의 고동뢰 소대장과 대원 9명을 무송에 파송해 김성주 일당을 퇴치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김성주 일당은 무송에 도착해 피곤하게 잠든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덮쳐 전원 사살하고 그들의 권총을 탈취한 후 사라졌다.
김일성 장군 부대의 대원이 된 김성주
그 무렵 안도현에 살고 있던 김성주의 모친 강반석이 1932년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933년 6월에 김성주는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중국인 항일부대의 하나인 오의성(吳義成) 부대에 나타나 오의성의 당번병으로 시작하여 그 부대의 대원이 되었다.
1934년 2월 당시 동만주과 남만주에는 의용군·구국군·자위군 등의 이름으로 20∼30명 또는 100∼200명 규모의 100여 개의 항일(抗日) 부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오의성의 동북의용군은 600여 명의 대원을 거느린 대부대였다.
1936년 4월에 오의성 부대는 중국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제2군·제5군과 합동으로 항일 협동전선을 구축했다. 그 해 8월17일에 동북 항일연군 제6사단, 즉 김일성 부대는(북한의 김일성이 아님) 오의성 부대와 합류하여 약 2000명의 병력으로 무송현성(撫松縣城)을 포위 습격하는 합동 작전을 벌였다. 이때 김성주는 제6사 김일성 부대의 대원으로 전속했던 것이다.
1937년 초에 안도현 치안대의 한국인 이도선 경좌(警佐)가 김일성 부대 토벌에 나갔다가 그 부대의 소년대원 한 사람을 붙잡았는데 자신의 이름은 김영주이고 바로 위의 형 김철주는 1935년에 죽고 “큰 형 김성주는 지금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라고 진술했다. 그때 김성주는 중국인 친구 장아청과 함께 김일성 부대, 즉 동북 항일연군 제6사단의 대원이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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