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여 년 동안 허공을 떠돌던 ‘붉은 악령’이 마침내 남한 땅에 출현하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마침내 이 땅 위에 실체로 등장하였다… 남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 치떨리는 부르주아 지배체제를 사회주의혁명의 불길로 살라 버리고 마침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조직하여 역사적 출범의 큰 걸음을 내딛는다.”
이 인용문은 1991년 적발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출범 선언문 중 일부이다. 1990년대는 좌익운동사에서 레닌(V.L. Lenin)의 혁명 전략에 기반하여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활동한 시기이다. 이른바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소수 정예의 전문 직업혁명가가 등장한 것이다.
1990년대 초 적발된 ‘혁노맹’(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과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 대표적 사례다. 사노맹은 출범 선언문에서 자신들이 혁명적 사회주의자 조직임을 밝히고 자본가계급에 대항한 계급 전쟁과 남한 사회주의혁명에 나설 것임을 당당히 선언했다. 또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무장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동안 적발된 좌익세력들은 하나같이 법정에서 자신들은 빨갱이가 아니라 민주화운동세력이라고 강변했으나 사노맹은 당당히 자신들이 사회주의 직업혁명가임을 밝혀 충격적이었다. 1991년 12월24일 대법원은 사노맹을 사회주의혁명을 목표로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헌법의 대전제인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하려는 단체로,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반국가단체라고 판시했다. 당시 박노해(본명 박기평)·백태웅·남진현 등 100여 명이 검거됐다. 문재인정부 시절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던 조국도 사노맹의 직속기관인 ‘사과원’(남한사회주의과학원)의 운영위원으로 암약하다 사법처리된 바 있다.
당시 좌익 조직의 지휘부 주류는 1980년대에 양성된 좌익 학생운동권 출신의 직업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박노해는 노동자 출신의 직업혁명가로 좌익운동의 판을 전환시켰다. 당시 이들 전위(前衛) 조직은 하부에 학생 대중조직을 구축하여 투쟁했다. 혁노명은 산하에 민학투련(민족민주학생투쟁연맹)을, 사노맹은 전민학련(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를 구축했다. 학원계와 노동계가 좌익 혁명인자를 발굴하여 제공하는 이른바 공급망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들 세력은 ‘단선연계 복선포치’(單線連繫 複線布置)의 조직 운영 원칙을 적용하며 간첩을 능가하는 철저한 조직보위책과 보안 수칙에 의한 비밀 활동을 전개하여 대공수사당국을 따돌렸다.
이 시기 또 하나의 특징은 좌익세력이 우리 사회 각계·각 분야에 일종의 ‘좌익 네트워크’(Left Network)를 형성하여 투쟁했다는 점이다. 좌익세력은 1980년대에 주로 학원계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산시켜 왔으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육계·문화예술계(문학·음악·미술·연극·영화·무용·사진·국악)·종교계·언론계·여성계·과학기술계·재야 정치권 및 심지어 정부 사이드와 군(軍)에까지 침투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우리 사회 내에 강력한 연대력과 조직 복원력을 지닌 ‘네트워크’(일종의 거미줄 구조)를 형성하여 활동해 왔다. 대표적 사례는 재야 통일전선체인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진보정치연합·민노총·한총련 등이다.
또한 1990년대에는 좌익세력의 이념적 토대가 다변화되고 공산주의 지향이 노골화되었다. 이들의 사상적 토대는 정통 공산주의 사상인 ‘맑스레닌주의’와 북한식 공산혁명 사상인 ‘주체사상’이었다. 그러나 맑스레닌 계열에서는 1990년대 초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알튀세·발리바르·그람시 등의 네오맑시즘(Neo-Marxism) 및 트로츠키 사상을 수용하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연유로 좌익세력이 종북세력인 NL주사파 이외에도 북한과 연계되지 않은 자생적인 좌익세력(맑스레닌계: NDR·PDR·트로츠키파 등)이 대거 등장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시기 좌익세력은 ①이론적으로 정교하게 무장되었으며 ②조직 규모가 확대되었고 ③간첩을 능가하는 철저한 조직 보위책을 운용하고 있고 ④투쟁 양상도 합법·반(半)합법·비합법투쟁을 적절히 배합하였으며 ⑤투쟁 영역도 북한 및 국제 맑시즘조직과 직접 연계하는 등 비약적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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