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89] 5.3사태 혼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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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4-21 06:20:30

오빠에게 무시당해서 서러운 게 아니었다. 혁명에 따르는 혼란이었다. 승연은 풍요에 젖어 시대의 아픔을 읽지 못하는 부르주아적 발상이 혐오스러웠고 변혁을 거부하고 안주하려는 안일주의가 역겨웠다. 아버지를 이해시키려 했던 건 아니다. 다만 승연의 행동을 철부지의 치기로 취급하는 탓에 감정이 복받쳐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고 마찰을 일으킨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아버지의 불 같은 역정 앞에서 승연이 한다는 게 고작 빈약한 비유뿐이라 허탈했다.

5월3일은 때 이른 여름 날씨처럼 더웠다. 신민당이 전국을 돌며 개헌추진위원회 지부 결성대회를 열었는데 마지막이 인천이었다. 모든 시민단체와 노조·재야 세력이 총 집결된 대회는 공권력과 부딪혀 아수라장이 될 게 뻔했다. 승연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회사로 간 아버지가 걱정됐다. 부평 주안산업단지에 있는 아버지 회사는 심각했다. 노조 파업으로 공장 가동이 중지된 상태였다.

홍대입구역에서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에서 갈아타면 주안역까지 40분 거리였다. 아버지 공장이 세워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찾은 적 없는 초행길이었다. 1호선은 붐볐다. 특히 신도림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려는 승객들이 쏟아졌다. 주안역이나 부평역으로 가는 시위대였다. ‘독재 타도’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른 사람들 수가 승객의 반이었다.

승연과 기순은 주안역 2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주안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울·인천·경기 지역 대학생들이 4월28일 분신한 김세진·이재호의 죽음을 두고 미 제국주의와 전두환 정권은 물러나라고 주장하며 곳곳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승연은 기순을 찾을 수 없었다. 인파에 쓸려서 자리 지키기가 힘들었다. 주안역 2번 출구에서 기순을 못 만나면 정오에 교보생명 정문에서 보기로 했다.

승연은 철규나 기순이 없이 혼자서 구호 외치며 시위할 엄두가 안 났다. 승연은 정오 전까지는 주안역 2번 출구에서 끝까지 기순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기다려도 기순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승연이 건너편 시민회관 쪽으로 가기 위해 사거리로 내려가는데 서문통닭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윤희숙이었다. 선배! 승연이 소리쳤다. 희숙은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숙은 승연을 보자 놀라는 기색이었다.

“네가 여길 왜?”

희숙은 주변을 살피더니 잽싸게 승연 손을 낚아챘다. 희숙은 당황했다. 여기서 만날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간 안 보여서 궁금했는데 선배도 여기 오셨구나. 희숙은 빨간 티셔츠에 검정색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자른 상태였고 피부는 거칠었다. 분명,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 혹시? 승연이 묻자 희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바위나 신기촌 방향으로는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친 상태였다. 주안 성당 쪽으로 다시 올라가야 했다. 그때 인노련과 서노련 무리가 “노동자·농민 피땀 짜는 미국놈을 몰아내자!”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삼민 헌법 쟁취하자!” 구호를 외치며 성당 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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