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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장은 원술을 데리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그래, 그동안 어디에 있었나?”
“태백산에 잠시 머물다가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어디를 가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원술이 심경을 담담히 밝혔다.
춘장은 원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불충불효한 사람이 되어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지 않았던가. 그 생채기는 어떤 처방으로도 아물게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제때, 잘 돌아왔네. 이제야 우리의 죄를 조금이나마 씻을 기회가 찾아왔네.”
대장군의 가슴속에서 새삼 격정이 꿈틀거렸다.
“그 때문에 장군께 청을 드리고자 합니다.”
“말해 보게나.”
“이번 전투에서 저를 선봉에 세워 주십시오.”
우물처럼 어둡고 고요하기만 했던 원술의 얼굴이 한순간 장작불처럼 불타올랐다.
“자네가 앞장서 준다면 군사들도 용기백배하여 싸울 걸세.”
신라군에게 있어 김유신이란 이름은 숭앙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그의 죽음은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선두에 서서 목숨 걸고 싸운다면 신라 군사들도 김유신을 떠올리며 힘을 얻을 것이었다.
다음 날 동이 트자, 신라의 군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대오를 정비한 군사들이 부대별로 매초성 앞에 펼쳐진 평야지대로 이동하여 육화진을 펼쳤다. 기병의 진로를 막는 임무를 띤 장창병이 선두에 서고, 한층 강력해진 노를 소지한 궁노수와 창칼을 든 보병이 그 뒤쪽을 차지했다. 둥그렇게 원을 그리며 진을 친 본대를 중심으로 방형을 취한 부대들이 여섯 방향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원술은 그중 오른쪽 선두에 자리한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대열 맨 앞에 선 원술은 담담하게 당 진영을 바라봤다. 매초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포진한 당군은 그 수효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20만이란 숫자가 부풀려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원술은 적의 수가 많든 적든 상관없었다. 백 명이 달려들면 백 명을 베고, 천 명이 덤벼들면 천 명을 참하면 될 일이었다. 온 힘을 다해 싸우다가 기운이 빠지면 그대로 적의 창에 몸을 내주면 그만이었다. 원술에게 있어 이곳은 비참한 삶을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바꿔 줄 용서와 축복의 땅이었다.
이윽고 매초성에서 북소리가 들렸다. 종현산 아래 진을 치고 있던 당의 기병이 일제히 신라 진영을 향해 내달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신라군을 일거에 쓸어 버릴 듯했다. 하지만 신라 군사들은 마치 뿌리가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신라의 궁노수가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수백 명의 당나라 기병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당군의 진격 속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화살로 막기에는 기병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당군이 가까이 접근해 오자 궁노수들은 장창 부대 뒤로 물러났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장창병들의 심장 박동도 덩달아 빨라졌다. 선두에서 달리는 말의 갈기가 흔들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자 짧은 북소리가 한 번 울려 퍼졌다. 이를 신호로 장창이 전방을 향해 날을 세웠다. 미처 멈추지 못한 말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는 창날에 뛰어들었다. 말의 가슴에 박힌 창이 등을 꿰뚫고 나왔다. 고통에 찬 울음소리와 함께 말 등에 타고 있던 기병이 땅에 곤두박질쳤다.
당나라 기병의 움직임이 주춤하자 장창 부대 후위로 물러섰던 궁노수들이 다시 화살을 날렸다. 당 고종이 탐낼 만큼 신라노(新羅弩)의 위력은 대단했다. 쏟아져 내린 화살은 당군의 갑옷과 마구를 뚫고 살가죽 깊숙이 파고들었다. 놀란 말들이 방향을 잃은 채 사방으로 뛰는 통에 대오가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졌다.
원술은 당나라 군사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놓치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대당에 속한 선봉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적진을 누비는 원술의 활약은 눈부셨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돌적인 공세는 당군을 주눅 들게 했다. 그의 창이 번쩍일 때마다 당나라 군사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원술은 나뭇가지를 쳐내듯 거침없이 창을 휘둘러 적군을 해치웠다.
이를 지켜본 신라 군사들은 크게 감명받았다. 대장군 김유신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그의 기백은 신라군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당군을 향해서 성난 파도처럼 달려들었다.
제아무리 군사의 수가 많다 해도 전투에서 기세를 잃게 되면 만회하기가 어려웠다. 차츰 수세에 몰리던 당나라 군사들은 춘장의 본대와 천존·죽지가 이끄는 좌·우익이 일시에 공격해 오자 당해 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수많은 당군의 목숨을 빼앗았고, 말 3만여 필을 비롯해 다수의 치중을 노획했다.
원술은 달아나는 적군을 쫓아 말을 달렸다. 그는 창과 칼로 당군을 도륙했다. 귓전을 때리는 비명이 자기 목을 조르고 있는 굴레가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죽음의 공포로 일그러진 당병의 얼굴을 보며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에게 있어 승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비겁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뿐이었다. 만약 이곳이 죽을 자리라면 이제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매초성 전투에서 참패한 이근행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20만의 군사로 고작 5만의 신라군에게 당한 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치욕이었다. 이것이 상대를 얕잡아본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니 차라리 칼을 물고 죽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을 여유조차 없었다.
신라군과의 계속된 전투로 군중에서 식량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설인귀의 군대가 천성에서 패하여 돌아간 이후 보급선이 차단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근행의 부대는 그동안 매초성 인근에서 거둬들인 식량에 의존해서 버텨 왔지만, 이제 근거지인 성마저 잃고 쫓기는 신세였기에 굶주림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식량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근행은 주변에 있는 성을 약탈하기로 했다. 이때, 시야에 들어온 것이 바로 아달성(阿達城)이었다. 이근행은 간자를 보내 아달성을 염탐하게 했다.
때마침 아달성의 백성은 성주 한선(漢宣)의 명을 받고 며칠째 성 밖에 나가 삼(蔘)을 심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간자로부터 이를 전해 들은 이근행은 밤을 도와 성 주위에 군사를 숨겨 놓고 아달성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다.
다음 날 해가 뜨자 성문이 열리고 농기구를 든 장정들이 밖으로 나왔다. 당나라 군사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굶주린 이리 떼처럼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아달성의 수비를 맡고 있던 장수는 소나(素那)였다. 그는 백성군(百城郡·안성) 사람으로, 백제군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심나(沈那)의 아들이었다. 심나는 백제군 사이에서 날아다니는 신라 장군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용맹하고 민첩했다. 소나 역시 날렵한 용장이었다. 그는 옛 백제 땅에서 백제 유민과 당 잔병의 저항을 진압한 공으로 한주 도독의 추천을 받아 북방의 요지인 이곳 아달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당군이 쳐들어오자 성민은 겁을 집어먹고 허둥댔다. 당나라 군사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소나는 이를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는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승냥이 떼처럼 몰려오는 당군을 막아섰다.
“네 이놈들, 심나의 아들 소나가 여기 있다. 너희가 정녕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썩 나서라. 내 단칼에 황천으로 보내 주마!”
소나가 큰 칼을 휘두르며 나서자 당나라 군사들은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 틈에 신라군은 기세를 올리며 당군을 공격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은 해가 저물 무렵까지 이어졌다. 고작 1000여 명의 군사로 수만의 당군을 맞아 한나절을 버텨 낸 것이다. 소나는 온몸이 칼과 창에 찔린 상처투성이였지만 여전히 선두에 서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백여 명이 군사만이 살아남아 적군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 그에 비해 그들을 둘러싼 당군의 병력은 오히려 늘어만 갔다. 승패는 이미 갈렸지만 당군은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소나가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근행은 궁수들에게 명해 적장에게 화살을 쏘게 했다. 소나의 몸에 여러 개의 화살이 박혔다.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갈 수 없다!”
마지막 남은 힘까지 짜내 외치는 소나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서서히 쓰러졌다. 그를 따르던 신라 군사들도 당군이 쏜 화살에 맞아 생사를 달리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소나의 의연한 모습에 기가 질려 그가 쓰러진 걸 보고도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날 당나라의 대군을 맞아 불굴의 의지로 싸운 아달성의 신라군은 모두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
춘장이 이끄는 신라군은 이근행의 군대를 몰아내며 칠중성을 위시해 호로하 주변의 성들을 모두 수복했다. 연이은 참패를 당한 당장 이근행은 패잔병을 이끌고 압록수를 건너 요동으로 달아났다. 이로써 신라군은 압록수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깨끗이 몰아냈다. 신라는 나당 연합군이 결성될 당시에 당 태종이 신라에 주기로 약조한 패수 유역과 원산만 일대에 군사를 진주시켰다.
매초성 전투는 나·당 전쟁의 분수령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승리는 늘 신라군의 몫이었다. 신라군은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결정적으로 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듬해, 당 고종은 설인귀를 보내 기벌포를 쳤다. 설인귀는 어렵게 기벌포에 상륙했지만 신라군의 반격에 수많은 군사를 잃은 채 퇴각해야 했다. 이 싸움을 마지막으로 고종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다. 이로써 신라군은 나라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문무왕은 매초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아찬 춘장을 중시(中侍)로 임명하고 목숨 걸고 신라를 지킨 장수들에 대해 논공행상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왕이 춘장을 가까이 불렀다.
“원술의 소식은 여전히 없는가?”
원술의 눈부신 활약을 전해 들은 문무왕은 누구보다 기뻤다. 이제 태대각간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듯했다.
국왕은 원술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춘장의 말에 따르면 어느 날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고 했다.
문무왕은 백방으로 원술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오늘 같은 날 아버지와 외숙부께서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문무왕은 오늘따라 선왕인 무열왕과 태대각간 김유신이 그리웠다. 금방이라도 어딘가에서 두 사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듯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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