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하나를 떠날 수 있을 때, 다른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다름 만남 역시, 같음 떠남을 전제한다. 이는 나를 비우고, 나를 내려놓고, 나로부터 한 발 거리를 두려는 자세로 이어진다. 자신의 울타리를 활짝 여는 ‘열음’의 자세다.
사람마다 정도와 색깔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는 지금 여기의 나 혹은 나의 인적, 물적 환경에 많이 갇혀 있고 붙들려 있다. 문을 열어야, 내가 나가든 남이 들어오든, 나와 남은 격리(隔離), 유리(遊離), 분리(分離)됨이 없이, 소통하면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만날 때, 나와 너는 ‘질 좋은 함께’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다름 만남은, 다시 같음 떠남을 촉진한다.
같음에 거리 두면서, 다름을 만날 수 있을 때, 같음에 갇힘의 문제가 보다 명료해진다. 같음에 갇혀 이를 지당(至當)하다고만 할 때, 무리(無理)가 따른다.
같음이나 유리(有利)에 붙들려 있거나, 위에 눈치 보고 다수에 눈치 보면서, ‘상심’(上心)과 ‘중심’(衆心)에 영합(迎合)하면서 이와 같아짐은 이에 갇혀짐이다.
소수의 다름이지만, 아니, ‘작은 다름’이지만, 이 다름은 굉장한 창의력이 될 수도 있으며, 하의 다른 생각들은 상의 생각을 풍성하고 기름지게 해줄 수도 있다.
춘추전국 시대의 백가(百家)가 쟁명(爭鳴)할 수 있는 시대적 토양이 없었다면, 그렇게 몇 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 행동을 결정해 온 풍성하고 창조적인 사상들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
갈릴레이(Galilei, 1564~1642)의 지동설이나 12억 뷰(view)를 넘는 싸이의 비디오도 모두 다름의 효과라 할 것이다. 창의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조건들의 연구 및 응용은, 이윤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기업들의 경영기법에서도 많이 도입하는 추세다.
하나의 판단이 완전할 수 없는 한, 이런 불완의 판단을 기워주고 키워줄 수 있는 환경은, 같음에 머물 때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 다른 것을 자유롭게 찾고 만날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함께 사는,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함께의 개인행복을 찾고 이루기 위해서, 나, 너, 나와 너, 우리는 같음들에 붙들림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나와 같음에 갇힐 때, 남을, 다름을 어떻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들과 함께 말하면서 평화 속에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남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배려하지 않고도 나의 행복이 가능하다면, 생각과 소통, 나아가, 삶의 ‘왜곡’ 속에서만, 혹은 일시적으로만 가능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다름과 바르게 만나고 소통하는 기술, 예술이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인성과 소통이 함께 말해지는 까닭은, 참다운 소통은 다름을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인정하기를 전제하고도 결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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