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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공작원 김동식 회고록-죽기 위해 살아야 하는 운명
[평양에서 왔습니다] <15> 물에 빠지고 감전되고… 죽을 고비 넘긴 천운
김동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2-27 06:30:47
▲ 김동식 前남파공작원‧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창고 같은 교실, 무서운 담임선생님
 
내가 전학 가서 편입된 반은 과산고등중학교 인민반 3학년 1반이었다. 같은 학년에 2개의 반이 있었는데 남자반은 1, 여자반은 2반이었으니 당연히 나는 1반이 된 것이다. 등교 첫날 담임선생님을 따라 내가 공부할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교실이 너무도 초라하고 어두워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 교실은 학교 본관과 신관 사이 공터에 지은 작은 건물에 있었는데, 지붕은 볏짚을 엮어서 올린 초가지붕이었고 교실 바닥은 시멘트 포장도 하지 않은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교실 바닥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교실 창문도 크기가 작은데다 유리가 없어 두꺼운 비닐박막으로 대충 가려 놓았기 때문에 흐린 날에는 선생님이 칠판에 쓴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었다.
 
당시 내가 공부했던 교실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차라리 창고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고, 아마 당시 북한 내에서도 그 정도로 낙후한 곳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반은 새 교사 건설이 완공될 때까지 창고보다도 못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농민들이 회합 장소로 이용하는 회의실에 옮겨가 이동수업을 해야 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무섭기로 소문난 권주화 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을 무서워한 이유에 대해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반 아이들이 대체로 공부를 못 하고 싫어했는데, 이러한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욕도 하고 엄하게 통제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전학을 온 다음 나를 분단위원장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1년 만인 4학년 초에 결혼해 학교를 그만두셨다.
 
당시 내가 할머니에게 담임선생님의 결혼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할머니는 스승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표시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분단위원장이었던 내가 생각 끝에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해 드리기로 하고 아이들한테 조금씩 돈을 모아 만년필과 그릇 등 몇 가지 물건을 마련해 선생님에게 결혼 선물로 드렸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느냐며 고마움을 표시하셨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후에는 담임선생님을 다시 본 적이 없다.
 
고된 시골학교 생활
 
농촌 지역인 과산리로 이사와 보니 태탄읍이 자그마한 도시였음에도 거기에 살 때는 해 보지도 않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많이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가을에 접어들자 학교에서는 인민학교 3학년 이상 학생에게 산에 가서 도토리를 따오라고 지시했다. 산에서 따온 도토리를 그냥 학교에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은 다음 바짝 말려 절구에 찧어 도토리 쌀로 만들어 가져오라고 하였다. 할당량도 인민학교 3학년 학생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은 부모님이 장마당에 가서 도토리를 사다 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도 혼자서는 할당량을 채울 수 없어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도와주어서야 겨우 채울 수 있었다.
 
또한 인민학교 3학년 이상 학생들은 봄과 가을이 되면 오전에만 정상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전적으로 농촌 지원명목으로 협동농장(집단농장)의 모내기와 옥수수 심기, 김매기와 가을걷이 등 잡다한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겨울에는 다음 해 농사에 필요한 거름을 마련한다며 얼어붙은 소똥·개똥까지 모아 학교에 가져가야 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토끼 기르기와 학교 교사 건설 등에 동원되었다.
 
 
▲ 북한 노동자와 학생들이 2015년 2월8일 반미교양 시설인 황해남도 신천박물관을 관람하고 있다. 북한은 6·25전쟁 시기 신천 지역에 주둔한 미군이 “2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천여 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신천박물관에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반미교양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신천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4학년 때는 각목과 널판지를 자른 다음 못을 박아 토끼장을 만들다가 판자에 박힌 못이 위로 솟아 있는 것을 모르고 밟아 못이 신발 바닥을 뚫고 발바닥에 그대로 박혀 고생했던 적도 있다. 이때 할머니가 민간요법이라며 신발에 오줌을 받은 다음 그대로 신고 있으면 괜찮다고 해서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스스로 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학기말이나 학년말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는 과외 공부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한편, 당시에는 시골에 교통수단이 없어 어디를 가든 걸어 다녔다. 해마다 4월과 6월이면 군() 내 학생들이 전부 읍내에 모여서 진행하는 사로청·소년단 연합단체 대회를 할 때도 5가량 되는 읍까지 당일 아침에 1시간 동안 걸어가 행사에 참가하고 그날 저녁으로 또다시 걸어서 집에 돌아와 다음 날 아침에는 등교해 수업에 참가해야 했다.
 
인민학교 4학년 때는 과산리로부터 약 40가량 떨어진 황해남도 신천군까지 걸어가 신천박물관을 참관하고 돌아온 적도 있다. 신천박물관은 6·25전쟁 때 신천군 인구의 30% 이상이 미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하면서 그 당시의 자료와 유물을 전시해 놓고 반미교양을 하고 있는 북한의 대표적인 반미교양 장소다.
 
낫에 찔리고 전기에 감전되다
 
이러한 가운데 인민학교 4년 과정을 마치고 고등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북한에서 자란 사람들이 다 그러하듯 해마다 봄과 가을에는 학업을 전폐하고 1~2개월씩 식량을 가지고 농촌 지원에 동원되어야 했다.
 
여기에다 가을에는 농촌 지원 말고도 예전부터 하던 도토리 따기 과제는 물론 조금 컸다고 산에 가서 낫을 들고 겨울철 교실 난방용 나무까지 베어 와야 했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모든 일이 서툴렀고, 일하는 과정에 크고 작은 사고도 많이 발생했다.
 
중학교 1학년 가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학교에서 2가량 떨어진 야산에 올라 낫으로 겨울철 교실난방용 나무를 베게 되었다. 우리가 베는 나무는 떡갈나무와 억새 같은 잡초였다. 잡초를 낫으로 벤 다음 새끼로 한 아름씩 묶어 놓았다가 겨울이 되면 그것을 실어다 한 단씩 때는 방식으로 교실 난방용 땔감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나의 낫질 솜씨가 숙련되지 않고 서툴러서 낫으로 나무를 쉽게 베겠다며 내리친 것이 나무 대신 내 무릎을 내리찍어 약 3cm가량 낫 끝이 무릎 아래에 박히고 말았다. 내가 아프다고 소리치며 넘어지자 정연복 담임선생님이 망설임 없이 손수건과 옷 안감을 뜯어내 그것으로 허벅지 부분을 묶어 지혈시킨 다음 나를 등에 업고 2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진료소까지 달려가 치료를 받도록 해 주셨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봄에 동원되는 농촌 지원에 나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 토끼사육장 건설 노동을 하다가 전기에 감전되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사실 그날은 비가 온 다음 날이어서 땅이 젖은 상태였는데,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전기가 진짜 통하는지 한번 시험해 보자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낮은 곳에 가설한 구리 전기선을 겁도 없이 건드렸다가 감전되고 말았다.
 
당시 내가 전기에 감전되어 거의 정신이 혼미해지던 상황이었는데 옆에서 톱질 하던 친구가 톱으로 전기선을 내리쳐 끊음으로써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내가 탈진 상태로 누워 있으니 같이 일하던 선생님이 나에게 죽는지 사는지 한번 시험해 보려고 그랬냐며, 하여튼 몸속에 있던 잡병은 모두 없어졌을 것이라고 웃으면서 얘기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웃으면서 농담 삼아 그런 얘기를 하셨겠지만 죽을 고비를 넘긴 나로서는 너무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여튼 나에게는 이때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하고 살아난 이후로 두 번째로 겪은 위험한 고비였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광탄천과 나의 소년시절
 
푸르른 산과 기름진 들판을 지나 서해의 넓은 바다로 흘러드는 광탄천, 나는 유년시절과 마찬가지로 소년시절도 광탄천과 더불어 보냈다. 내가 과산리로 이사와 사는 동안 힘겹고 위험한 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산리에서의 소년시절은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간직하게 해 준 낭만적인 시절이기도 하다.
 
복잡하고 힘겨운 가운데서도 봄이 오면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금향산(계명산으로도 불림)에 올라가 도라지·더덕·칡뿌리를 캐 먹고 주변 야산에 올라서는 싱아와 찔레도 꺾어 먹었다. 그리고 산골짜기 자갈밭에서 몸보신과 관절 치료에 좋다는 왕지네도 잡았고, 그러다가 왕지네에게 물리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토끼풀을 하러 간다며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광탄천에 나가 하루 종일 물놀이도 하고 발목까지 빠지는 물속에서 은어와 불거지(피라미모래무지·메기 등 물고기를 나무막대기로 내리쳐서 잡은 다음 그것으로 어죽을 쑤어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강기슭 밭에 심은 참외와 수박·토마토·오이 그리고 사탕무를 서리해 먹으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밭에 재배하던 사탕무는 일반 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쿠바에서 들여온 식용작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탕무는 너무 달콤해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가을철에 접어들면 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따면서 다래와 머루··개암·잣 등 각종 산 열매를 따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농장 밭에 들어가 콩과 옥수수를 서리해 먹기도 했다. 콩은 꼬투리가 달린 채로 꺾어 한 대씩 논바닥에 촘촘하게 꽂아 놓고 그 위에 볏짚을 덮은 다음 불을 지르면 콩대와 껍질·볏짚만 불에 타고 콩알은 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그대로 남는다. 그러면 그것을 한 줌씩 쥐고 입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 재가 날아가도록 한 다음 콩알만 먹던지, 윗도리를 벗어 키질하듯 흔들어서 바람을 세게 일으켜 재를 날려 보내고 콩알을 먹으면 된다. 이런 것을 당시 고향에서는 콩청대라고 했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202111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 후 대한민국 국민의 4대 의무 중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마친 아들과 내가 직접 나눈 대화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아들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는 형식으로 본 연재의 각 회차 마무리를 대신하려 한다.
 
 
아들: 어릴 때 저희를 위해 썰매를 직접 만들어 주실 때나 저희 방에 필요한 것들, 혹은 엄마가 필요해서 뭐든 말만 하면 직접 뚝딱대며 만들어 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저희는 그럴 때마다 아빠를 맥가이버라고 부르기도 했었구요. 아버지로서 혹은 남편으로서 말고, 아버지 본인만을 위해 꼭 한번 배워 보고 싶은 게 있다면 뭐예요?
 
아버지너희들이 어렸을 때 썰매와 팽이를 직접 만들어 준 것은 어렸을 때의 추억도 있고, 또 내가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야. 한국에는 아이들이 노는 데 필요한 장난감이나 스포츠용품을 모두 만들어서 팔고 있고, 그것들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도 풍부하지만 내가 어렸을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북한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없어. 그래서 썰매든 뭐든 나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었어.
 
만약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 배워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목공 기술이야. 어렸을 때도 뚝딱거리며 무엇이든 만드는 걸 좋아했거든. 그래서 2년 전에 마음먹고 목공기술을 배우는 목공학원에 등록하고 몇 주간 기술을 배워 서랍장을 만들었는데, 정말 뿌듯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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