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06] 럭키 문이 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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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의 세월조차 한순간일 뿐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1-06 06:20:04

- 가깝지만 아주 먼, 멀지만 아주 가까운, 안으로, 깊은 곳으로 다가오는 것들. 현실 속에서 감각하는 것들은 다만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바다를 이루는 것이 하루에 수십만 번 부서지는 파도일 뿐이라고 달빛이 말해 주었습니다. 비로소 멀리 있던 것들이 가깝게 다가오는 밤이었습니다.

1977년 12월, 비스바덴에도 크리스마스이브에 뜨는 보름달, 럭키 문(Lucky Moon)이 밤하늘을 눈부시게 비추었습니다. 비비안과 나타샤, 소피아와 마리아는 다른 간호사 친구들과 함께 행운의 달이 뜬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시내로 떠났습니다. 그날은 북쪽 광산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간호사들을 만나기 위해 한 차에 네다섯 명씩 끼어 타고 중부와 남부로 내려왔기 때문에 시내가 온통 들썩거렸다고 했습니다. 갱도가 무너져 환자로 실려 왔던 광부 중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나타샤의 연애는 그즈음 한창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밤, 나는 자진해서 야간 당직을 섰습니다. 그날은 아무도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요.

환자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하고 간호사실로 돌아오던 나는 복도 창으로 하늘 높이 떠 오른 달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달빛이 실내 가득 비쳐 들어 눈이 부셨습니다. 눈은 오지 않았지만 달빛이 눈부시도록 뽀얀, 화이트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당신이 너무나, 그리웠습니다.

“언젠가 이렇게 밝은 달을 당신과 함께 볼 수 있을까요?”

내가 소리 내어 물었을 때, 당신의 대답처럼 시내의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가 이내 사라졌습니다.

그 후 3년 만에 독일에서 돌아왔을 때 우린 다시 만났습니다. 모든 걸 잃고 살아갈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던 나를, 당신은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처음으로 꿈꾸어 보는 나의 집이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끝에 달아 둔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습니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테라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달빛이 바다 가득 넘실거리고 있었지요. 당신은 둥근 달빛 한가운데 앉아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내게 읽어 주었습니다.

티끌 한 톨에도 우주의 영원함이 담겨 있고

셀 수 없는 티끌들이 저마다 무한한 우주이니

끝없는 세월조차 한순간의 생각일 뿐,

한 찰나의 생각 속에 영원이 흘러가네.

시를 읽어 준 당신은 달빛이 비치듯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달은 언제나 보름달이오.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실을 믿어야 하오.”

처음 만난 이후 우리의 인연은 계속 어긋났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은 이야기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비록 함께할 수 없었지만 당신의 마음은 나와 함께했다는 고백이라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늘 함께하겠다는 맹세라고, 나는 이해했습니다.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잡았습니다.

“이곳을 해월영(海月影)이라고 부를래요.”

나는 당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습니다. 하늘의 달은 둥글고 밝아서 출렁이는 바다 위에 비친 그림자조차 이지러지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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