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204] 미하엘, 나의 미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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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환하고 따뜻한 세상

김규나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1-04 06:20:41

- “나도 당신에게 환하고 따뜻한 세상이었소?”

미하엘이 물었을 때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내 대답은 진심이었고 미하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치료를 받고 난 뒤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래요. 나는 살았습니다. 살아서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던 미하엘과 결혼했습니다. 도박 빚에 쫓겨 다니던 전남편이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갈 거라는 말을 남기고 실종된 지 5년이 지나 재혼하는 데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미하엘은 나의 전부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고 내 인생은 그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나는 의대에 입학했고 학위를 마쳤으며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받을 때보다 나 자신을 더 자랑스러워했던 순간은 운전면허증을 취득했을 때였답니다. 독일에서는 나이 숫자와 동일한 시간만큼 운전 실습을 해야 시험 볼 자격이 주어졌는데 두 번이나 떨어지고 세 번째 붙었지요.

처음엔 트럭만 쫓아가다가 빨간 신호인 줄 모르고 정지를 못 했어요. 두 번째는 후진 주차를 못 해서 떨어졌지 뭐예요. 실망한 저에게 미하엘은 자신도 세 번이나 떨어졌다면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아우토반을 달린 최초의 동양 여성’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가 내 사진과 함께 지역 신문에 실렸답니다. 미하엘이 기사를 오려 만들어 준 액자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거실 벽을 장식하고 있지요.

나는 그와 테니스를 쳤고 수영을 했고 왈츠를 추었으며 똑같이 베토벤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를 같이 여행했습니다. 향기로운 덩굴장미와 계절 채소들이 풍성한 정원도 함께 가꾸었지요. 하지만 나를 가장 편안하게 했던 시간은 햇빛 가득한 정원의 흔들의자에 앉아 미하엘이 서점 글릭스라트에서 가져다주는 책을 읽을 때였습니다. 더 이상 독일어 사전 없이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건 물론이었지요. 그런 나를 보며 미하엘은 놀리듯 말하곤 했습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한순간도 멈춘 적 없지. 돌며 구르며 멀리멀리 간다네.”

미하엘은 한국말을 배울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내가 그와 이야기를 하다가 표현하고 싶은 말을 찾지 못해 답답해할 때 미하엘은 나보다 더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오랜 숙고 끝에 미하엘은 정색하며 내게 다짐했습니다.

“난 절대, 한 글자도 한국어를 배우지 않겠소. 당신이 당신의 모국어로 쓰는 그 노트를 우리 집 어디에든 펼쳐놓을 수 있게 말이오. 그건 당신의 추억이고, 여긴 당신의 집이니까.”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 나는 노트를 펼쳐 두었습니다. 그 위에 독일어로 쓴 메모지 한 장을 올려 두었지요.

‘나는 이따금 이곳에 없어요. 그러나 반드시 당신 곁으로 돌아옵니다. 사랑해요. 당신의 에바.’

나는 그의 사랑을 신뢰했고 우리의 관계는 견고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환하고 따듯한 세상이었냐고요? 오 미하엘. 당신은 나의 햇빛이었어요.”

나는 미하엘의 이마와 뺨, 코와 입술에 차례로 입 맞추었습니다.

[글 김규나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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