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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는 현숙이·경숙이·미숙이와 함께 참 흔했던 ‘숙이’ 중 하나였다. 많게는 한 반에 8명까지 있었다고 하니 ‘정숙이’는 부모들이 유난히 선호했던 이름이었던 듯하다.
김미향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살아가며 알게 된 ‘정숙’이라는 이름에는 ‘곧고 맑다’는 뜻 외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정(貞)’이라는 한자에는 ‘곧다’는 뜻 외에도 비슷하게 ‘충실하고 올바르다·정절’이라는 뜻이 있었다. ‘숙(淑)’이라는 한자에는 ‘맑다’는 뜻 외에도 ‘어질다·얌전하다’는 뜻이 있었다. 고운 이름이었지만 거기에는 정조 있고 얌전해야 한다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덕목이 있었다.”
남자가 주인이었던 세상은 당연하다는 듯 여성에게 정숙을 요구했다. 하지만 어느덧 여성도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맘껏 펼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2008년부터 2024년까지 정숙이라는 이름의 출생신고가 단 32건만 이루어진 것을 보면 부모들도 철학이 변한 모양이다.
최근 들어 정숙이가 핫하다. 현재 방영 중인 TV드라마 ‘정숙한 세일즈’의 주인공은 한정숙(김소연)이다. 작은 시골 마을 금제의 고추아가씨 출신인 정숙은 예쁘고 똑똑하고 이름처럼 ‘정숙’하다. 단 하나 흠이라면 남편을 잘못 고른 것. 남편은 성질을 못 참아 직장을 잃은 주제에 바람까지 피운다.
가난에 떠밀려 더 이상 갈 곳을 잃은 정숙은 성인용품 방문판매를 시작하고 특유의 단아한 외모와 배려심 있는 태도로 뛰어난 ‘마케터’로 성장한다.
드라마의 배경은 성(性)이 금기시되던 1992년이다. ‘정숙한 한정숙’이 서울도 아닌 작은 시골 마을에서 성인용품 방문판매를 하면서 본인은 물론 소비자의 성 의식까지 바꾸는 혁신의 주인공이 된다는 스토리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작년에도 한바탕 정숙이 바람이 불었었다. 드라마 ‘닥터 차정숙’은 집과 가족밖에 모르던 정숙한 주부 차정숙(엄정화)이 주인공이다. 그는 오랜 전업주부 생활을 뒤로하고 20년 만에 다시 의사 가운을 입는다.
가정의학과 1년 차 레지던트 차정숙은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보란 듯 훌륭한 의사로 자리매김한다.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의사가 아니라 자신의 장점인 엄마 케어를 통해 환자들을 따뜻하게 보살핀 덕이다.
두 정숙이는 ‘정숙’이 여성 최고의 덕목인 시대에 태어나 경쟁 시대의 약자로 살아가지만 약점일 수도 있는 정숙함을 이용해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킨다. 약함이 강함이라는 옛말은 옳다.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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