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열의 스파이 세계]<37> 日人으로 국적 세탁한 고려인 출신 러 간첩 ‘구로바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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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23 06:31:10

러시아는 자국의 정보요원을 국적 세탁하여 전 세계의 현지 국가에 잠입시켜 암약케 하는 위장 정보요원 침투 공작을 일상화하고 있다. 2022년 12월 슬로베니아 정보보안국(SOVA)에 의해 체포된 두 명의 러시아 부부 스파이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들 부부는 러시아 군정보총국(GRU) 소속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아르헨티나 이민자로 국적을 세탁하여 슬로베니아 수도 교외의 중산층 지역에 두 자녀와 함께 살면서 갤러리 및 정보기술(IT) 사업을 운영하며 평범한 삶을 연출했다. 이웃 주민들에겐 아르헨티나의 치안 불안 때문에 슬로베니아로 이주하게 됐다고 둘러 댔다.

이들 부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인 슬로베니아를 거점으로 삼아 유럽 전역을 누비며 정보원들에게 공작비를 제공하고 본국의 지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스파이 활동을 위해 어린 자녀들까지 이용한 것이 밝혀져 서방 정보당국을 경악케 했다. 이들이 검거된 것은 미국 정보기관의 제보에 의해서였다.

한편 1995년 3월23일 일본 경찰청은 미 중앙정보국(CIA)으로부터 “‘구로바 이치로’를 사칭하는 러시아 해외정보국(SVR·구 KGB 제1총국) 소속 스파이가 일본에서 미국 군사 정보와 일본의 산업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른바 구로바·우드빈 사건의 단초였다. 일본 경찰청은 특별수사팀을 편성해 추적에 나섰지만 구로바는 이미 베이징으로 출국해 버려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주변 수사를 통해 일본인으로 국적을 세탁해 30년간 암약해 온 러시아 스파이의 실체를 파악했다.

▲ 구로바 사건을 소개한 전 알본 내각정보관 기카무라 시게루의 저서 ‘외사경찰비록’(2023). 필자 제공

진짜 구로바 이치로(黒羽一郎)는 1930년 4월 일본 후쿠시마현 니시시라카와군 야부키초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치과 기공사로 일하던 그는 28세 되던 1958년 청각장애를 가진 여성과 동거를 시작했다. 1960년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그는 대화가 어려운 동거녀와의 생활에 피로감을 느끼고 동료들에게 자주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1965년 6월 구로바는 “친구와 산에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당시 35세였던 구로바의 실종은 생활에 지쳐 가출한 것으로 단순 처리되었다.

그러나 1966년 겨울 도쿄 아카사카의 보석회사에 ‘구로바 이치로’라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는 영어·러시아어·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영업사원으로 보석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진짜 구로바는 몸집이 작고 얌전하게 생겼는데 가짜 구로바는 풍채가 좋고 사업가처럼 생겨 외모상 크게 차이가 났다.

가짜 구로바는 1969년에는 신주쿠구로 이주해 장기 해외 출타 중인 위기관리회사 사장의 저택 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무단으로 집주인 몰래 저택 부지에 조립식 건물을 세우고 파칭코 기계를 만들어 팔았다. 구로바는 1975년 6세 연하의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고 1985년에는 네리마구의 호화 아파트를 구입해 살았다. 그러다가 1995년 CIA의 제보 시점에 베이징으로 출국해 버렸다.

그렇다면 구로바 행세를 한 인물은 누구인가. 그는 러시아 해외정보국(SVR) 소속의 고려인(조선계) 출신 러시아 정보원으로 알려졌다. 외모가 조선계여서 일본인과 흡사했다. 그는 진짜 구로바가 실종된 시점에 그의 신분을 도용해 스파이로 암약했다. 그의 상부선은 일본주재 러시아대사관 1등 서기관의 직책을 가진 V. P. 우드빈이었다. 그는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해외정보국(SVR) 요원이었다.

우드빈은 1965∼95년 3차례(소련 시절 2차례·러시아 시절 1차례)에 걸쳐 주일대사관에 3등 서기관·2등 서기관·1등 서기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일본에 있는 자국 스파이를 감독하는 상급 스파이였다.

일본 수사팀은 구로바의 자택과 그의 부인을 24시간 체제로 감시했는데 우드빈이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1997년 6월 구로바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본 총영사관에 여권을 갱신하러 나타나 그의 가짜 신분이 공식 확인되었다. 마침내 수사팀은 1997년 7월 구로바의 자택을 압수수색 했다. 여기서 간첩 통신 장비인 단파 라디오·난수표·통신 제원표 등과 일본 주둔 미군 정보·일본의 최첨단 반도체 정보·카메라 렌즈 기술 등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구로바의 아내도 러시아 측과 암호화 통신을 하거나 수사관들의 얼굴 사진을 찍는 등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던 것으로 판명돼 체포되었다.

구로바와 부인은 단파 라디오로 모르스부호의 5자리 숫자를 수신하고 난수표로 문장을 해독해 지령을 받았고, 입수한 각종 정보를 마이크로필름화 해서 청량음료수의 빈 캔에 넣어 신사(神社)·공원 등 약정 정소에 가져다 놓으면 러시아 측의 정보원이 회수하는 ‘데드 드롭’(Dead Drop) 방식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엔 간첩죄가 없었기 때문에 수사팀은 이들 부부에 대한 수색영장을 여권법 위반 혐의로 발부받았다. 이후 일본은 2012년 ‘특별비밀보호법’을 제정해 스파이 활동에 대처하고 있다.

일본 수사팀은 압수수색 후 주일 러시아대사관에 우드빈의 출두를 요청했지만 그는 외교 특권을 이용해 출국해 버렸다. 결국 이 사건은 관련자들이 출국해 버려 대상자들을 정밀 조사하지 못했지만 이의 실체는 대략 파악됐다.

이러한 수법은 북한의 대일 공작에도 자주 등장한다. 1985년에 검거된 간첩 신광수는 일본 요리사 ‘하라 다다아키(原勅晁)’를 북으로 납치하고 그의 신분을 도용, 하라 다다아키로 변신해 일본에 침투해서 암약했다.

구로바 사건은 일본 내각 정보관을 역임한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가 저술한 ‘외사 경찰 비록’(문예춘추·2023)에 상세히 소개돼 있다. 이 책은 국내에서 ‘일본의 스파이 전쟁’(번역 정지운·감수 이병호)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