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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은 군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아버지의 처소로 뛰어갔다. 때마침 밖으로 나오는 걸사비우와 마주쳤다.
대조영이 다급히 물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의원의 말이 오늘 밤을 넘기시기 어렵다고 하네.”
이에 충격을 받은 대조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미 병세가 깊어진 지 오래네. 다만, 결전을 앞두고 자네의 심기가 어지러워질까 봐 그동안 숨기셨던 것이네.”
대조영은 정신이 나간 듯 아무 말도 못 했다.
“마음을 굳건히 하게. 아버지의 바람은 자네가 이 땅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고구려를 부흥시키는 것이네. 부디 명심하게나.”
대조영은 간신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걸사비우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침상에 누운 대중상은 마치 잠이라도 자는 듯 평온해 보였다.
대조영은 침상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소자 조영이 왔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아버지께서 품었던 원대한 꿈을 이루겠습니다.”
대조영은 부친 앞에서 맹세했다. 순간, 대중상이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이 아들에게로 옮겨갔다. 대조영은 슬픔 속에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밤, 고구려 유민의 북극성이었던 대중상은 조상이 기다리고 있는 하늘로 떠났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각지의 고구려 유민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 그들은 고구려의 혼을 지키며 평생을 살았던 대중상을 가슴에 묻었다.
얼마 후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이 신성에 다다랐다.
고구려인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당나라 대군과 싸워야 했다.
이해고는 대중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이 쉽게 되어 간다고 여겼다. 그는 곧바로 신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성의 수비는 무척 견고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군사가 대조영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적을 막았다. 당군이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많은 희생만 치르고 물러났다.
이해고는 할 수 없이 장기전에 대비해야 했다. 그는 일단 군사를 물리고 진을 쳤다. 이로써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한동안 거셌던 당군의 공격이 잠잠해지자 대조영은 군사들을 쉬게 하는 한편, 장수들을 소집했다. 그는 지휘부에 모인 장수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모두 오랜 전투로 지쳐 있었고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대들의 노고에 힘입어 적의 공격을 잘 막아 내고 있소. 하지만 이대로 전투가 계속된다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소.”
피가 펄펄 끓는 좌장군 연철생(延哲生)이 대조영의 말을 가로막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죽기 살기로 맞서 보는 수밖에요. 우리는 모두 일당백의 용사입니다. 게다가 신성은 험준한 요새입니다.”
“그렇게만 볼 건 아니오. 지금 남아 있는 양곡이 불과 한 달 치 정도요. 저들이 장기전으로 가면 우리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오.”
대조영이 이치를 따져 얘기하자 연철생이 고개를 떨구었다.
분위기가 침울한 가운데 걸사비우가 나섰다.
“그러면 어찌해야겠는가?”
“성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가려 합니다. 한참 가다 보면 동모산(東牟山·길림성 돈화현)이 나옵니다. 당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고 지세가 험하니 가히 도읍으로 삼을 만한 곳입니다.”
동모산으로 가겠다는 말에 장수들은 한목소리로 동의했다.
대조영은 좌중을 둘러본 후 걸사비우에게 말했다.
“숙부님께서는 경기병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당군의 시선을 돌려 주십시오. 저는 그 틈을 타 백성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겠습니다. 적을 맞아 싸우시다가 적당한 때를 봐서 패한 척 성으로 돌아오십시오. 당분간 우리가 성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당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며칠 동안 농성을 한 후 야음을 틈타 성을 빠져나오십시오. 당군이 추격해 올 때쯤에는 우리 모두 이미 멀리 가 있을 겁니다.”
이어서 아장 고등(高等)에게 명했다.
“장군은 오늘 밤 노약자와 아녀자들을 데리고 먼저 출발하시오. 시간을 다투는 일이니 절대 지체해서는 안 되오.”
고등이 명을 받고 물러가자 대조영은 다른 장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좌장군 연철생과 우장군 아불진(阿弗進)은 각 부대를 점검하고 행군할 준비를 하시오.”
장수들이 각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간 후 대조영은 걸사비우를 따로 불렀다.
“숙부님께 위험한 임무를 맡겨야 하는 제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뒤에 남아 당의 대군과 맞서 싸우다가 제때 몸을 빼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걸사비우의 노련함을 믿어서 어려운 임무를 맡기기는 했지만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걸사비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내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따라갈 테니.”
장군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임무를 완수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걸사비우는 말갈족 군사를 포함한 5000명의 별동대를 이끌고 남쪽 성문을 빠져나와 당군의 영채로 나아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당군의 진영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과연 10만 대군의 위용은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만큼 대단했다.
걸사비우는 군사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 화살비가 쏟아지자 당군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지닌 화살에는 한계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비한 화살이 동났다. 고구려의 별동대는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창칼을 들고 달려 나가 당군을 공격했다. 당나라 군사들도 이에 질세라 무기를 휘두르며 맞섰다. 한바탕 접전이 펼쳐졌다.
창칼이 부딪쳐 불꽃이 튀고, 갑옷이 맞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토해 냈다. 함성과 비명이 어우러지고 쇠와 북소리가 장단을 맞췄다. 마치 아비지옥에서 펼쳐지는 악극(樂劇)과 같은 모습이었다. 양측에서 적지 않은 사상자가 쏟아졌다.
양군이 뒤엉켜 싸우는 가운데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걸사비우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성안으로 돌아와 보니 대조영이 군민을 이끌고 성을 빠져나간 후였다.
이튿날, 아침부터 당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당군은 어제의 손실을 만회하려는 듯 악착같이 성벽으로 달려들었다. 성벽 위의 고구려 군사들은 화살을 날려 접근을 막았다. 성벽을 타고 오르던 당군 중 상당수가 죽거나 다쳤다.
날이 저물자 당나라 군사들은 슬그머니 물러갔다.
신성을 포위한 채 며칠을 보낸 이해고는 성안의 간자로부터 대조영의 주력군이 밖으로 빠져나가 동쪽으로 달아났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는 속임수에 넘어간 자신을 탓하며 전군을 동원하여 성을 매섭게 공격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싸움은 이튿날 정오까지 이어졌다. 걸사비우의 별동대는 대조영이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버텼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싸웠지만 주력군이 빠져나간 마당에 오래 버티기는 어려웠다. 마침내 성 한쪽의 수비가 무너졌다. 당군이 새까맣게 성벽 위로 올라섰다. 걸사비우는 혼전 중에 목숨을 잃었다. 많은 사람의 희생 끝에 당군이 결국 성을 점령했다.
험준한 산을 넘고 거친 물살이 일렁이는 강을 건너는 강행군이었다. 장정도 참기 힘든 여로(旅路)를 가다 보니 아녀자와 노인은 초주검이 됐다. 그렇다고 쉬어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군사들은 길을 걷다 기진하여 쓰러진 이들을 수레나 말에 태우고, 이마저도 여유가 없으면 등에 업고 행군했다.
행군 이레째 되는 날, 대조영은 전령에게서 걸사비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버지를 잃은 후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존재의 죽음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뒤따르는 고구려 유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몸이었기에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었다. 대조영은 이를 꽉 물고 갈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2천여 리를 행군하여 그들이 이른 곳은 송화강 아래에 있는 천문령(天門嶺)이었다. 산속 골짜기에는 어느새 녹음이 깔려 있었다. 굽이굽이 깊고 좁은 골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한번 몸을 숨기면 수만의 군사를 푼다 해도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대조영이 군민을 이끌고 한 달 넘게 걸리는 먼 거리를 달려온 이유도 이런 지형의 험준함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대조영은 좌장군 연철생과 우장군 아불진에게 천문령 협로 양편에 매복하게 한 후 본대를 이끌고 출구 앞에 펼쳐진 구릉 지대로 나아가 주둔했다.
얼마 후 척후를 나갔던 도무개(都無蓋)가 돌아왔다. 그는 걸사비우의 부장으로 신성에서 간신히 탈출해 대조영이 이끄는 본대에 합류했다.
“당군이 천문령 입구에 당도했습니다.”
대조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곳이 저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그는 휘하의 기병을 나누어 본대를 엄호토록 했다.
대조영이 만반의 준비를 마쳤을 때 당나라 군대가 천문령 입구로 들어섰다. 한참 지형을 살피던 당군 중랑장 색구(索仇)가 수장 이해고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처럼 험준한 산길에서는 대군을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적의 복병이라도 맞닥뜨린다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겁니다. 일단 척후병을 보내 위험이 있는지 살핀 후에 진군해도 늦지 않습니다.”
이해고는 이전부터 색구를 마뜩잖게 여겼다. 무후가 거란족 출신인 이해고가 변심할까 두려워 그를 중랑장으로 삼아 감시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조영은 잔뜩 겁을 먹은 탓에 성조차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 그런 자가 매복을 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있지도 않은 매복을 걱정해서 반도의 뿌리를 뽑을 기회를 놓친다면 폐하께 뭐라 변명할 것이냐?”
이해고가 무후를 들먹이자 색구도 진군을 반대할 수 없었다.
당군이 숲 사이 고갯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하지만 무성한 나무 탓에 앞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괴괴하여 군사의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 그리고 수레 구르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숲속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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