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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696년 5월, 당나라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이 영주의 유성을 공격해 당나라 도독 조홰(趙翽)를 죽이고 거란족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진충은 예전에 당 고종으로부터 우무위 대장군·송막 도독을 제수받았지만 거란인으로서의 자존을 잃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는 당의 그늘에서 벗어나 거란족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던 차에 당군이 토번·돌궐과의 싸움에 주력하느라 요서 지역에 공백이 생겼다. 이진충은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처남인 귀성 자사 손만영(孫萬榮)을 비롯한 거란족을 규합해 유성을 쳤다. 영주부의 핵심인 유성은 요서의 중심으로 주변의 부족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유성이 함락되자 당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해족(奚族) 등 여러 부족이 거란의 편에 섰다.
이를 지켜본 영주의 고구려 유민은 드디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당군에 저항하다가 영주로 끌려와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요동으로 돌아가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은 드디어 고구려 장군 대중상(大仲象)을 중심으로 속민(屬民)이었던 말갈족까지 끌어들여 크게 봉기했다.
한편, 측천무후는 영주의 유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 돌궐과의 싸움에서 고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북방까지 시끄러우니 당 조정에는 난감한 일이었다.
무후는 이진충이 차츰 세력을 넓히며 위세를 떨치자 토벌군의 파병을 결정했다. 더 방치했다가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은 동북 지역을 고스란히 잃을 수 있었다.
무후는 조서를 내려 응양장군 조인사, 금오대장군 장현우 등 28명의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이진충의 세력하에 놓인 평주를 쳤다. 그러나 이미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던 거란군에게 대패하고 장현우 등 여러 장수가 포로로 잡히고야 말았다.
그해 10월, 거란족의 우두머리인 이진충이 병사했다. 처남인 손만영이 그 뒤를 이었다. 이후로도 당나라 무후가 여러 차례 군대를 파견했으나 번번이 패배했다.
무후는 당군이 거란족에게 연이어 패하자 어쩔 수 없이 돌궐과 밀약을 맺어 거란을 양면에서 협공하는 작전을 도모했다. 이는 역대 왕조에서 사용해 온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책이었다.
회유에 넘어간 돌궐 군주 묵철(默啜)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당군과 합세하자 거란족은 차츰 수세에 몰렸다. 그러다가 든든한 우군이었던 해족이 당 쪽으로 돌아서고 거란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항복하면서 그 세력이 크게 약화했다.
당과 돌궐의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거란족의 주력 부대를 궤멸시켰다. 이 와중에 손만영은 목숨을 잃었다. 그가 죽자 무후는 항복한 이해고를 대장군으로 삼아 잔당을 소탕하게 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대중상은 장수들과 머리를 맞댔다.
“손만영의 죽음으로 거란군이 와해되었으니 우리에게도 영향이 있을 것이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소?”
대중상의 물음에 걸사비우(乞四比羽)가 대답했다. 그는 말갈 추장으로, 대중상의 의제(義弟)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당의 대군을 막아 내기 어렵습니다. 일단 군사를 수습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번에는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나섰다.
“거란군이 영주를 휩쓰는 사이 당의 안동도호부가 있는 신성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하를 건너 신성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곳은 예전부터 우리나라 요충지였으므로 우리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기에 알맞습니다.”
이 당시 당나라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토번 등과의 전쟁에서도 고전하게 되자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신성으로 옮긴 상태였다.
“네 말이 옳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듯하구나.”
대중상은 젊은이들을 한곳에 집결시켰다.
“우리가 나라를 잃고 당군에게 끌려온 지도 어언 20여 년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고국의 산천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너희 역시 나와 다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제 나는 너희와 함께 꿈에도 그리던 요동 땅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앞으로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그 무엇도 우리의 귀환을 막지 못하리라. 고구려의 용사들이여, 조상의 가호가 있을지어다.”
수장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 속에서 잠자던 고구려의 혼이 깨어나 포효하고 있었다.
영주를 떠난 대중상 일행은 요하를 건너 신성에 닿았다. 성을 지키던 당군은 대중상의 군대를 보고 크게 놀라서 성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대중상은 신성에 터를 잡고 고구려의 옛 땅인 요동에서 세를 규합해 나갔다. 불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부여성 등 요동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대중상을 지도자로 받들고 고구려의 부활을 꿈꿨다.
한편 무후는 많은 수의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영주를 떠나 요동에 터를 잡았다는 보고를 받고 걱정했다. 만일 이들이 고구려 부흥을 꾀하면서 당에 대항한다면 커다란 골칫거리가 될 수 있었다. 당장 군대를 파견해 근심의 싹을 자르고 싶었지만 연이은 전쟁으로 핍진한 상황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힘에 부쳤다. 무후는 할 수 없이 사신을 보내 이들을 회유하기로 했다.
한 달 후, 당의 사신이 대중상을 찾아왔다. 사신은 대중상을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책봉하고 당군에 저항했던 자들의 죄를 사면하겠다는 무후의 뜻을 전했다. 대중상은 무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에 고개를 숙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적할 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예전에 받았던 치욕을 되갚아 주고 싶었다.
당의 사신이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간 후 대조영이 부친의 처소를 찾았다.
“저들의 제안을 거절했으니 분명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겁니다.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네 말이 옳다. 내 너에게 전권을 줄 테니, 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대조영은 명을 받들어 물러가자 대중상은 의제 걸사비우를 불렀다.
“어인 일로 찾으셨습니까?”
걸사비우가 활기찬 모습으로 들어섰다.
대중상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찾는가. 오랜만에 같이 술 한잔하려고 오라 했네.”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어찌 술을 마다하겠습니까.”
걸사비우는 잔을 들어 대중상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시종이 나간 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술잔이 오고 갔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지요?”
걸사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중상과 십여 년을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낸 사이였기에 얼굴빛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자네를 어찌 속이겠는가. 실은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네. 얼마 전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네. 그래서 은밀히 의원을 불러 보였더니, 사기(邪氣)가 골수에 이르러 소생할 가망이 없다더군.”
충격을 받은 걸사비우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천명을 다했으니 뭐 억울할 게 있겠나. 다만, 큰일을 앞두고 먼저 떠나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네.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걸사비우는 간신히 대답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부디 조영이와 함께 옛 고구려의 영화를 되찾아 주게나. 그 아이가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지혜도 있지만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울 걸세. 자네가 옆에서 성심을 다해 도와준다면 아무 걱정 없이 하늘로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조카가 대업을 이루도록 돕겠습니다.”
생전 울어 본 적이 없는 걸사비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중상은 대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밝아진 얼굴로 의제의 잔에 술을 따랐다. 넓고 다부진 걸사비우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렸다.
돌아온 사신의 보고를 받은 무후는 대중상을 치기로 했다.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철칙이었다. 이러한 냉정한 판단과 냉혹할 만큼 과감한 결단력이 오늘의 그녀를 있게 했다.
무후는 이해고에게 대중상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했다. 이해고는 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10만에 이르는 이해고의 군대가 출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조영은 성곽을 보수하고 병장기를 점검하여 결전에 대비했다.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에 당의 대군을 상대하는 데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자신을 믿고 따라 준 유민을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군사를 격려하고 백성을 안심시켰다. 그의 모습은 강풍에도 꺾이지 않는 소나무처럼 믿음직스러웠다.
이날도 대조영은 성곽을 따라 걸으며 허술한 곳이 있는지를 살피고 있었다.
이때 멀리서 군사 하나가 사색이 되어 헐레벌떡 뛰어왔다.
“장군,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냐?”
대조영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주공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대조영은 놀라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대조영은 당의 침략에 대비하느라 밤낮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아버지를 거의 볼 수 없었다. 가끔 회의할 때 보면 얼굴이 수척해 보이긴 했지만 걱정이 많아서 그럴 거라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소리를 들으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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