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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모잠은 뜻을 함께하는 젊은 신하들과 함께 보장왕의 편에 섰다. 하지만 이미 나라 곳곳에 깊숙이 뿌리박은 연씨 세력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들의 눈 밖에 난 검모잠은 중앙에서 밀려나 궁모성(窮牟城·서흥)의 성주로 보내졌다.
검모잠이 궁모성에서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연개소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그나마 강단 있게 당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인물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뒤를 이을 남생은 광대한 고구려를 이끌 만한 재목이 아니었고, 보장왕은 연개소문의 울타리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장 조정을 장악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검모잠이 진작에 국왕을 자각시키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날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검모잠의 우려는 적중했다. 연개소문 아들들의 골육상잔과 함께 고구려는 크게 흔들렸다. 이 틈을 노리고 쳐들어온 당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을 비롯한 많은 왕족과 대신이 백성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
검모잠은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었다. 이제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 때가 온 것이었다. 그는 궁모성 주변의 유민을 규합하여 당의 관리를 공격하고 살해했다. 이는 당나라에 보내는 경고였다.
부대의 규모가 커지자 그들은 당군의 표적이 됐다. 검모잠은 궁모성이 많은 적을 맞아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패수를 건너 한성(漢城)에 터를 잡았다.
검모잠은 신라와 접촉을 하는 한편 각지에서 당군에 저항하고 있는 고구려 부흥군의 구심점이 될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자면 정통성 있는 고구려의 왕족이 필요했다.
때마침 보장왕의 서자(庶子)인 안승이 사야도에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를 국왕으로 옹립한다면 고구려 부흥 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검모잠이 직접 사야도로 온 것이었다.
안승의 허락을 얻은 검모잠은 사방에 고구려의 부활을 선포하고, 당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신라 문무왕은 이를 듣고 기뻐하며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인정했다.
당 고종은 고구려 부흥군이 둥지를 트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는 고구려뿐 아니라 애써 진압한 백제 지역에서도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배후에 신라가 있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고종은 마침내 고간을 동주도행군 총관으로 삼아 고구려 부흥군을 토벌토록 했다.
당의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안승은 얼굴이 사색이 됐다. 다시금 평양성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는 급히 장수들을 소집했다.
“지금 우리 병력으로 당의 대군에 맞서 싸우는 것은 무모한 일이오. 어찌하면 좋겠소?”
안승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에 비해 검모잠은 단호했다.
“우리에게 물러날 곳은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 싸워야 합니다.”
“무조건 맞서 싸우는 게 능사는 아니오. 일단은 신라로 몸을 피했다가 훗날을 기약하는 게 낫지 않겠소?”
“이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신라에 투항한다면 세상 모두가 우리를 업신여길 겁니다. 절대 고구려인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일단 당군을 맞아 싸우면서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검모잠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약한 안승은 그의 고집에 신물이 났다. 결코 그와 함께 죽고 싶지는 않았다.
안승왕은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 혼자서라도 신라로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검모잠이 절대 그리 놔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비록 안승이 임금이기는 했지만 고구려 부흥군을 움직이는 실세는 검모잠이었다. 군사들도 그의 명령을 따랐기에 안승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검모잠이 당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자 안승왕은 소형 다식(多式)을 불렀다. 다식은 한성을 근거로 유민을 모아 당군과 싸우고 있었다. 검모잠의 군대가 남하해 내려오자 그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거처할 곳과 양식까지 내주었다.
이때만 해도 다식과 검모잠은 친형제와 다름없이 돈독하게 지냈다. 그런데 검모잠은 안승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권력을 잡으면서 다식을 무시하고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 입 밖으로 뱉어 내지는 않았지만, 검모잠에 대한 불만이 그의 가슴속에 가득했다.
안승은 다식이 검모잠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의 불편한 심기를 읽었다.
“지금 검모잠은 자만심에 도취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소. 만일 이대로 당군이 쳐들어온다면 우리 모두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소.”
“폐하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하지만 군사들이 모두 그자를 따르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검모잠만 없어진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요.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장군밖에 없소.”
다식은 순간 긴장하여 주위를 살폈다.
“발각이라도 되는 날이면 저는 물론 폐하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집니다.”
“어차피 가만있어도 죽는 건 매한가지 아니겠소. 우리의 운명은 장군에게 달려 있소.”
다식은 곰곰이 생각했다. 검모잠만 없으면 자신이 고구려 부흥군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더러운 욕망이 그의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그날 밤, 다식은 품 안에 칼을 감추고 검모잠을 찾아갔다. 검모잠은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맞아들였다. 다식은 한동안 소원했다며 술이나 한잔하자고 청했다. 검모잠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흔쾌히 청을 들어주었다.
잠시 후 술상이 들어오고 술잔이 오갔다. 검모잠은 다식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따라 주는 대로 잔을 비웠다. 그러다가 취하여 탁자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다식은 천천히 품에서 칼을 빼서 검모잠의 목을 벴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붉게 물들이고 바닥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
검모잠의 죽음이 알려지자 군사들은 당군과 맞서 싸울 의욕을 잃었다. 안승왕은 그들을 설득하여 신라에 투항했다. 신라의 문무왕은 그를 거두어 금마저(金馬渚·익산)를 영지로 내리고, 보덕국(報德國)을 세워 허수아비 왕으로 삼았다.
이로써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검모잠의 소망은 소나기를 맞은 화톳불처럼 스러졌다.
수많은 깃발이 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말발굽 소리가 내를 지나 들판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놀란 날짐승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서서히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웅진도독부가 관할하고 있는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됐다. 품일과 문충 등의 장수가 이끄는 군대가 일거에 63개 성을 함락시킨 것을 비롯해 천존과 죽지의 군대가 7성, 군관과 문영의 군대가 12성을 점령하고 많은 당군을 도륙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덤벼드는 신라 군사들의 대담한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조차 못하고 성을 내주었다. 신라군이 총 82개 성을 얻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기세가 가히 바다를 뒤엎고 땅을 가를 만했다.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급기야 웅진도독부까지 쳐들어갔다. 그러자 당 조정도 더는 신라의 공세를 방관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은 백제 땅을 고스란히 신라에 내줄 판이었다. 당 고종은 먼저 대총관 설인귀에게 수군을 이끌고 백제 땅으로 출격하라 명했다. 그리고 총관 고간에게 패하 이서에서 당군에 저항하고 있는 나려 연합군을 진압하게 했다. 이로써 신라와 당의 전면전이 개시됐다.
당나라와 결판을 내기로 한 문무왕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당군이 웅진도독부를 구원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眞功)에게 군사를 주어 금강 어귀 웅포(熊浦)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장군 죽지(竹旨)에게 웅진의 요충지인 가림성(加林城)을 치게 했다. 가림성 주변의 평야는 웅진도독부의 군량을 대는 곡창 지대였기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이었다.
장군 죽지가 이끄는 신라군이 가림성에 당도했을 때는 곡식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죽지는 기마병에게 명을 내려 평야를 짓밟게 했다. 성벽 위에서 신라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당군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말발굽에 짓이겨지고 있는 곡식이 고립된 그들에게 유일한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가림성의 당군은 신라군을 저지하기 위해 성문을 열고 나왔다. 이는 죽지가 노리던 바였다. 그는 당나라 군사들이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멀리 석성까지 끌어낸 후에 공격을 퍼부었다. 당군은 여러 날 고립된 데다가 식량 확보마저 어려워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연전연승한 신라 군사들은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싸움의 승패는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갈려 있었다. 신라군은 이 전투에서 5000명이 넘는 당군의 목을 베고, 백제 출신 장수 2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6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가림성에서의 승리로 신라군은 웅진 일대를 장악했다. 궁지에 몰린 도독부의 군사들은 웅진성을 떠나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후로 신라군은 승승장구하여 백제 땅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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