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근의 미디어와 정치] 공영방송은 ‘정책 토론’으로 유권자 선택 도와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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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근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2-13 06:30:50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 여야 모두 본격적인 공천 절차를 시작하였고, 제3지대를 표방하는 정파들도 발 빠르게 연대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아마도 2월 하순 주요 정당 출마자들이 정해지면 본격적인 총선 분위기에 돌입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2년 가까이 집권 여당과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수를 가진 야당 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이번 총선이 사활을 건 총력전이 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되어 왔다.

더구나 극단적 팬덤 지지층을 기반으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패권 의식이 지배하고 있어 헌정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가 될 가능성도 높다. 이처럼 충동적 감성이 지배하는 중우정치(mobocracy) 구조에서 대의민주주의의 본질은 급격히 소멸되고 있다. 이념과 정책을 놓고 유권자의 합리적 판단으로 정치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민주주의의 이념은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미국이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튀르키에의 레젭 타입 에르도안은 대중의 감성적 지지를 기반으로 장기 집권을 이어 가고 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선택과 견제·균형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인터넷 같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허위 정보의 매개체가 되고 정치적 갈등의 진앙지로 작동하면서 이성적·합리적인 정치적 선택의 여지가 급속히 축소되고 있다. 우리 또한 몇 차례 선거를 거치면서 그런 양상을 이미 체감한 바 있다. 이번 총선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을 넘어 더욱 악성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정치권력과 유착된 일부 기성 언론들이 이런 반민주적 선거 행태를 더 부추길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 기간 중에 행해지는 방송사들의 선거 관련 프로그램의 역할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온라인을 통해 무분별하게 확산되는 가짜뉴스를 견제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의 중요성은 새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지향하는 유권자의 합리적 선택을 유인할 수 있는 선거 방송 또한 그만큼 중요하다. 특히 정당 혹은 후보자 간 토론 방송의 역할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유권자의 정책 투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실상 유일한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회의원 선거는 대통령선거와 달리 지역별로 후보자 간 토론이 이루어지고, 정책 토론은 정당 간 토론프로그램만 방송된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 기간 중에 방송되는 정책 토론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방송사들도 그저 관행적으로 제작·편성하고 있는 것 같다. 각 정당 대표들이 돌아가면서 정책을 발표하고, 사전에 약속된 순서에 따라 질의·응답하는 지극히 도식화된 토론 방식이 정형화되어 있다. 부실한 정책 내용은 고사하고 토론 방식 또한 정보적 가치가 거의 없는 의례적 이벤트처럼 되어 버렸다.

토론 방송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각 정당별로 정책 관련 질의·응답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이후 쟁점이 될 수 있는 사안들, 가령 남북 관계나 복지정책 같은 토론 주제를 정해 집중 토론하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내용도 재미도 없는 형식적 토론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뜩이나 각 정당이나 후보자들이 남발하는 비현실적 공약들에 대한 불신이 높은 상태에서 이런 도식적 토론 방송은 전파 낭비일 뿐이다.

TV 토론은 토론을 통해 각 정당의 정책을 비교하고, 상호 질의·응답을 통해 후보자의 대응 능력을 평가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지 성향에 따라 선택적 지각과 인지적 판단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TV 토론은 유권자가 가진 기존의 태도를 더 강화시킬 뿐 합리적 선택과 무관하거나 도리어 그것을 저해한다는 실증적 연구 결과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확증편향이나 극단적 성향이 집단 의견을 지배하는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 극심해지면서 TV 토론은 내용보다 지지자들의 온·오프라인 응원전이 지배하는 일종의 세 과시 이벤트로 변질되어 버린 느낌이다. 특히 선거방송을 주관하는 공영방송이 합리적 정책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권자의 선택을 유도하기 위한 의미있는 토론 프로그램 개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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