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다. 202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이 29조1678억 달러였다. 세계 전체 생산 가운데 25%를 차지했고 한국(1조8689억 달러)과 비교하면 15배 이상이었다. 잘나가는 미국에도 고민이 있다. 무역수지 적자가 무려 9184억 달러(약 1307조 원)였다. 아무리 궁리해도 천문학적 규모의 무역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은 1789년 획기적인 정책을 활용해서 세수 부족을 해결했다. 정부 재정의 90% 이상을 책임졌던 획기적인 정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관세였다. 미국 초대 정부의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에겐 두 가지 숙제가 있었다. 가난했던 미국 정부의 텅 빈 곳간을 채워야 했고, 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공업을 발전시켜야 했다. 특히 재정 문제가 심각했다. 프랑스에서 빌린 빚과 독립전쟁 당시 밀린 군인 월급을 갚아야 했다. 머리가 비상했던 서른세 살의 재무장관 해밀턴은 선진국 영국과 프랑스 등에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취약한 산업을 지키면서 부족한 세금까지 챙겼다. 관세는 미국 역사에서 발전의 밑거름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독 관세를 좋아한다. 트럼프는 워싱턴처럼 관세로 세수 부족을 해결하길 바란다. 워싱턴이 대통령이던 시절 미국은 보호무역으로 관세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경제와 산업이 취약했던 18세기 미국과 달리 오늘날 미국은 군사와 경제에서 단연 세계 최강이다. 하지만 강해졌다고 고민이 없을 리는 없다.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트럼프는 2018년 6월 중국산 제품에 관세 25%를 부과했다. 무역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트럼프는 올해 들어 동맹국에도 관세를 부과하기로 마음먹었다.
미국발 관세 폭풍이 거세다.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을 정도다. 관세로 무장한 트럼프는 미국에 공장을 지으라고 강요했다. 관세를 챙기면서 미국에 공장을 짓게 해 일자리까지 만들겠다는 뜻이다. 손 마사요시(한국명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을 비롯해 웨이저자 TSMC 회장과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까지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냉정하다 못해 잔인했다. 현대차를 칭찬했던 트럼프는 자동차 관세 부과를 예고했다. 무려 210억 달러(약 30조8500억 원)의 투자를 약속한 현대차에도 관세를 물리겠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호언장담했던 관세는 9일부터 부과됐다. 관세 부작용을 걱정한 탓인지 미국 주가가 폭락했다. 집권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트럼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골프장에 갔다. 그러나 웬걸, 관세를 부과한 지 13시간 만에 관세 부과를 90일 동안 미룬다는 발표가 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트럼프의 변덕에 스콧 베센트 미 재무 장관은 “처음부터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도 “언론이 대통령의 거래 기술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협상의 귀재라는 트럼프가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을까.
분명한 건 트럼프도 많이 놀랐다는 사실이다. 미국 채권시장에 안전자산으로 손꼽히던 국채 매도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관세로 버는 돈보다 국채 이자로 줄 돈이 많을 수 있다. 게다가 국채 금리가 오르면 미국 기업과 개인에게 이자 부담이 커지고 주택과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내년에 중간선거를 치를 트럼프에겐 끔찍한 상황인 셈이다. 이런 까닭에 관세 유예 조치는 작전상 후퇴가 아니라 채권시장을 달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미국 역사를 살펴보면 관세가 좋은 결과만 낳진 않았다. 미국 경제는 1929년 주가 폭락에 휘청거렸다. 기업 활동이 위축되고 실업자가 쏟아졌다. 미국 31대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는 1930년 관세 정책을 밀어붙였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법으로 손꼽히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앞세우자 영국과 프랑스 등은 일제히 보복 관세로 맞섰다. 상호 관세 부과 3년 만에 세계 무역 거래액은 3분의 1 토막이 됐다. 굶어서 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경제난은 심각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속담처럼 관세로 생긴 세금보다 부작용으로 인한 폐해가 컸다.
미국은 다음 주 한국과의 무역 협상을 예고했다. 트럼프는 관세와 함께 투자와 방위비까지 요구하고 있다. 관세를 조금 깎아 줄 테니까 알래스카 천연가스 관련 투자와 함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까지 더 내라고 요구할 게 뻔하다. 피할 수 없다면 냉정하게 판단한 뒤 단호하게 협상에 나서야 한다. 관세와 투자는 별개이고 방위비도 마찬가지라고 선을 그어야 한다. 트럼프가 돋보일 정도의 통 큰 양보를 할 때마다 눈에 띄지 않는 이익을 요구해서 꼭 얻어 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방위비 분담금을 높여 주는 대신 그 대가를 꼭 받아 내자는 뜻이다.
트럼프도 안다. 제2의 워싱턴이 되고 싶지만 제2의 후버가 될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잘 계산된 논리보다 치열한 협상으로 국익을 지킬 때다. 어차피 트럼프에게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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