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산호사건’은 북한이 1983년 여름 자신들의 민간 선박인 어군(魚群) 탐색선 ‘풍산호’가 남한 해군에 의해 격침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대규모 대남 비난 선전까지 했던 사건이다. 당시 북한은 남한 해군이 바다에서 수산자원을 탐색·연구하는 ‘풍산호’라는 북한의 민간 선박을 격침시켰다며 대규모 군중대회를 열고 극렬한 대남 비난 선전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북한의 모든 언론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북한 언론매체가 모두 보도했기 때문에 북한 자료를 찾아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격침된 ‘풍산호’는 수산자원을 탐색 ·연구하는 민간 선박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공작 기관인 중앙당 조사부 산하 원산연락소 소속의 공작선이었다.
해당 공작선은 일본에 침투하는 공작원을 싣고 일본을 향해 항해하던 중 항로를 이탈해 한국 영해를 불법 침범했고, 이를 발견한 대한민국 해군 구축함이 공작선 가까이에 접근해 정선을 명령했으나 도망가다가 격침된 사건이다.
여기에서는 필자가 1981년부터 15년간 북한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중앙당 연락부(현재는 문화교류국)에서 남파 공작원으로 생활하면서, 그리고 북한이 ‘풍산호’라고 부르는 공작선에 실제로 타고 있었던 당사자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내용을 토대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공개한다. 사건 발생 전후에 있었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공개함으로써 역사적 진실을 정확히 알리고 당시 북한의 주장과 대남 선전선동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이었는지 밝히려는 것이다.
1983년 8월 중순 북한 대남공작부서의 하나인 중앙당 조사부 소속 원산연락소 전투원들은 일본에서 활동하다 북한에 복귀해 공작 교육 및 훈련을 받고 다시 일본으로 침투하는 중앙당 연락부 소속 공작원을 공작선에 태우고 일본을 향해 출발했다.
당시 중앙당 조사부 산하에는 일본 침투를 담당하는 연락소가 원산·청진에 각각 있었고 서해안에는 대남 침투를 전문으로 하는 남포연락소와 해주연락소가 있었다. 그리고 동부 및 중부 전선을 통해 남한으로 침투하는 평강연락소 그리고 서부전선의 휴전선 돌파 및 한강을 통한 수중침투 방식으로 남한에 침투하는 개성연락소가 있었다. 그러니까 중앙당 작전부 산하에 해상과 육상(휴전선 및 수중)을 통해 대남 침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연락소가 6개 있었던 셈이다.
다만 청진과 원산에 있는 연락소들은 일본에만 침투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 동해상을 통해 남한에 침투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1983년 12월 다대포에서 검거된 전충남·이상규 씨가 바로 원산연락소 소속이었다.
한편,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당국은 북한 공작선이 자국 해안에 침투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공작원들을 공작선에 태워 일본 해안에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수많은 일본인을 납치해 북한으로 끌고 갔는데 일본 당국에선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해상 및 해안 경계가 허술하다 못해 무방비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에 침투하는 북한 공작선의 경우 그 흔한 자동소총도 싣지 않고 비무장 상태로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이 당시 일본에 침투했던 공작선 선원들의 한결같은 전언이다. 무장장비를 한가득 싣고 적지(敵地)인 남한에 몰래 침투하는 대남공작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에 침투하는 공작선에 승선한 전투원(승조원)들 역시 바짝 긴장해서 위험한 적지에 침투하는 대남 침투 요원들과 달리 휴가 가는 기분으로 공작선에 맛있는 먹을거리를 많이 싣고 제집 드나들 듯 긴장을 풀어놓은 채 편한 마음으로 오가고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일본에 침투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에 갔다가 북한에 돌아올 때는 먹을 것까지 미리 챙겨서 공작선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은 1983년 8월 중순 일본을 향해 침투하고 있던 공작선(풍산호)의 경우에도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 당시에 풍산호에 승선했던 엔진운영 담당 전투원 문시준의 전언이다.

문시준은 북한이 ‘풍산호’라고 가짜로 이름을 붙인 공작선에 타고 있던 전투원(승조원)으로 필자가 입학하는 해인 1981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제16기 졸업생이다. 대학시절에는 학생 중대장까지 했던 인물이다. ‘풍산호’ 사건 당시 공작선에 승선해 엔진 운영을 담당했었는데, 필자가 1994년 4월부터 평양시 동대원구역당 조직부장으로 간부현실체험을 할 때 같은 부서인 조직부에서 지도원을 하던 그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 알게 되었다.
문시준의 말에 의하면 북한에서 공작선을 이용해 일본에 침투하려면 동해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한국 영해를 침범할 수 있기 때문에 해도와 레이더로 선박의 위치와 항로를 수시로 체크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항로를 이탈하면 바로 잡아야 하는데 풍산호의 경우에는 긴장이 풀어져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작선(풍산호)에 승선했던 원산연락소 전투원들은 예전과 같이 마음이 한껏 들뜬 상태로 선실에 앉아 북한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던 주패(카드로 하는 북한식 게임)를 하거나 잠을 자면서 해도나 레이더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고 대충 일본 쪽을 향해 조타를 맞춰 놓고 가다가 깜빡하는 사이에 자신들도 모르게 한국 영해를 침범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강원함, 공작선은 격침시켰으나…
1983년 8월13일 울릉도 부근 해상에서 경계작전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남한 해군의 동해함대 소속 구축함 강원함(DD-922)은 먼 거리에서부터 불상 선박(공작선)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가 동 선박이 한국 영해를 침범하자 곧바로 접근해 선박의 용도와 국적을 밝히라며 배를 멈출 것을 명령했다.
그때까지 긴장이 풀어져 한국 영해에 들어선 줄도 모르고 있던 북한 공작선 승조원들은 갑자기 한국 구축함이 나타나 정선을 명령하자 깜짝 놀라 전속력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북한 공작선에는 1500마력짜리 엔진 4대가 장착되어 있어 전속력으로 항해하면 40노트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었는데, 당시 한국 해군에서 운용하던 구축함 강원함의 최고 속도는 30노트에 불과해 북한 공작선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강원함에는 북한 공작선보다 훨씬 빠른 헬기가 실려 있었다.
정선 명령을 거부하고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것으로 보아 동 선박이 북한 간첩선일 것이라고 판단한 강원함 함장은 헬기를 띄워 불상 선박을 추격하도록 했다. 불상 선박을 따라잡은 헬기는 계속되는 정선 명령에도 빠른 속도로 도망치자 장착하고 있던 대함 미사일을 발사했다. 그러나 미사일 발사를 예상한 북한 공작선이 지그재그로 도망가는 바람에 명중시키는 데 실패했다. 당시 공작선에는 무장 장비가 탑재되어 있지 않아 헬기에 대응 사격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사일로 북한 공작선을 명중시키지 못한 헬기는 강원함으로 돌아와 다시 미사일을 장착하고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북한 공작선을 따라잡은 다음 공작선이 또다시 지그재그로 도망갔지만 이번에는 대함 미사일로 공작선의 조타실 부분을 명중시켜 격침시키는 데 성공했다.
북한 공작선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한 헬기는 강원함으로 돌아와 착륙하였고, 강원함은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북한 공작선이 침몰한 해역 부근에서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에 격침된 공작선의 잔해로 보이는 몇가지 물품을 수거해 가지고 철수했다.
한편, 헬기의 대함 미사일에 맞아 격침된 북한 공작선의 조타실에는 당시 공작선 전체를 책임지고 지휘하던 조장(선장)과 함께 기관장(엔진 운영 책임자)·조타수 그리고 무전통신을 담당한 통신팀장, 레이더 담당 등 5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미사일에 맞아 사망했고 선박과 함께 바닷속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타실 뒤에 있는 선실이나 갑판 밑에 있는 기관실 등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일부 승조원들은 미사일 파편에 여기저기 크고 작은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조타실에 탔던 5명 외에 더 이상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공작선 갑판 밑에 장착되어 있던 자선(子船)과 비상용 무전기는 파괴되지 않고 멀쩡한 그대로였다.
이에 따라 공작선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승조원들과 안내원들은 온 힘을 다해 공작선 내부, 즉 갑판 밑에 장착되어 있던 자선(子船)을 빼낸 다음 거기에 모두 옮겨타고 밤새도록 전속력으로 일본 해안을 향해 도주했다. 일본에 침투하려던 공작원은 자그마한 상처도 입지 않을 정도로 멀쩡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선을 타고 일본 해안으로 도주하면서 비상용 무전기로 자신들의 상부 조직인 북한 중앙당 조사부에 관련 상황을 긴급 보고했다. 무전 보고를 받은 북한 중앙당 조사부에서는 급히 다른 공작선을 보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작전(이를 북한에서는 ‘구원 전투’라고 한다)을 펼쳤고, 다행히 부상자들을 구조해 북한까지 무사히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당시 부상자들을 태운 북한 공작선은 심야에 원산항으로 입항했는데, 혹시라도 일반인들에게 노출될까 봐 사전에 원산항의 조명을 모두 끄고 캄캄한 상태에서 입항했다고 한다.
항구에 입항한 공작선 승조원들과 공작원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여러 대의 앰뷸런스에 나누어 타고 조용히 평양에 있는 915병원으로 이동했다. 915병원은 당시 중앙당 조사부 소속 병원으로 ‘915연락소’라고도 했는데, 평양 형제산 구역에 위치한 대남 요원 및 공작원 치료 전문 의료기관이다. 무장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고 외부인들의 접근이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한 보안 유지가 가능한 곳이다.
한편, 한국해군 구축함에 의해 격침된 공작선을 타고 일본으로 침투하려던 공작원은 다친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휴식을 취하면서 정신을 가다듬은 후 다른 공작선을 타고 다시 일본으로 침투했다는 후문이다.
여기까지가 당시 있었던 북한 공작선 ‘풍산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다.
그런데 생존한 공작선 승조원들과 공작원을 무사히 구출한 다음에 보인 북한 당국의 반응이 참 가관이다.
북한은 모든 언론매체를 동원해 ‘남조선 괴뢰 해군 함정이 남포수산사업소 소속의 평화적인 어군탐색선(魚群探索船) 풍산호를 격침시켰다’며 극렬한 대남 비난을 하는 것도 모자라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중대회를 열어 남한의 만행을 규탄했다.
격침된 풍산호(공작선)가 동해 원산연락소 소속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반대편인 서해에 있는 남포 수산사업소 소속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물론, 공작선을 물고기를 탐지하는 민간 선박으로 둔갑시키는 앙천대소할 촌극을 스스로 연출한 것이다.
당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던 전투원(승조원)들은 대남요원 전문병원인 915병원에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가운데 치료를 받고 부상 정도가 약했던 일부 인원은 원산연락소로 복귀해 전투원으로서의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고 부상 정도가 심했던 일부 인원은 ‘영예군인(상이군인)’ 판정을 받고 제대(전역)하였다고 한다.
전역자 가운데는 앞서 언급한 문시준도 있었는데, 그는 공작선 갑판 밑에 위치한 기관실(엔진룸)에 있다가 미사일이 폭발하면서 생긴 파편 때문에 무릎 부위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결국 1981년 초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원산연락소에 배치된 지 2년 만에 실력을 인정받아 공작선에 기관수(엔지니어)로 승선했던 문시준은 무릎 부위 부상이 너무 심해 치료가 끝난 후 ‘영예군인’(상이군인) 판정을 받고 전역할 수밖에 없었고, 전역 후에는 고향인 평양시 동대원구역 청년동맹위원장을 거쳐 구역당 조직부 지도원으로 승진했다.
◆프로필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노동당중앙위 대외연락부 남파공작원으로 15년 활동(1981~1995)
-1990년 1차 침투 후 이선실 대동 복귀·간첩망 구축 등 공작임무 수행 후 복귀. 공화국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수여
-1995년 2차로 남파되어 간첩망 구축·거물 간첩 접선 등 임무 수행하다 검거
△국군기무사령부(현 방첩사) 분석관(1999~2006)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2008~2020)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북한대학원대학교 북한학 박사
△유튜브 ‘김동식의 북한S파일’ 운영
△대북전략컨설팅 대표
저서
△박사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기파랑, 2013)
△‘북한 대남전략의 실체’(기파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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