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20세기가 대서양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태평양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파다했다.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세계 경제의 성장 센터가 되면서 미국이나 유럽을 리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전히 진행형이라고는 하지만 애초의 예상에 비해 성장 동력이 반감하고 있다.
중국 경제가 미국과 대등한 수준의 규모로 커지긴 했어도 구조적인 문제가 불거지면서 휘청거리고 있다. 30년 이상 잃어버린 시간을 보낸 일본은 바닥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힘에 부쳐 보인다. 한국은 선진국 진입 과정에서 정치적 후진성과 산업 구조 개편 지연으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넘나들며 한쪽으로 힘이 기울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한·중·일에 대만까지 포함하는 동북아 경제가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각개전투를 하는 양상이다. 국가 간·산업 간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상호보완적 협력이 아닌 경쟁적 대립 구조로 바뀌었다. 한국이 일본을 넘어선 데 이어 중국이 한국을 넘어서며 역전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절대강자가 없는 미래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한국과 일본을 추월하고, 심지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정도다. 최근 한국경제인연합회가 발표한 한·중 8대 주력산업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을 보면 석유화학을 제외한 반도체·자동차·이차전지 등 7개 분야에서 중국에 크게 밀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문제는 갈수록 점유율 간격이 좁아지지 않고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제2의 일본이 될 수 있다는 세간의 평가가 10여 년 전부터 나왔다. 주로 일본이나 미국에서 이런 구설수가 돌아다녔다. 부동산·부채·산업 공급과잉 등에 더해 고령화 속도 측면에서 1990년대 초반의 일본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중국은 여전히 이러한 위기에 노출되어 있기는 해도 국가(공산당) 주도의 계획경제로 살얼음판을 간신히 통과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는 계속 침체하면서 거품이 꺼지고 있으며, 언제 대란이 와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기업과 지방정부의 부채 또한 천문학적 수치로 규모 파악이 안 된다. 산업 현장에서 기업이 직면하고 있는 과잉 공급은 밀어내기 저가 수출로 버틴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며 시작된 일본의 과거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강·온 대응을 병행하면서 위기를 넘기고 있다.
중국보다 늦긴 했어도 5~6년 전부터 한국이 일본의 뒤를 이어 잃어버린 세월을 보낼 수 있다는 나라 안팎의 진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나 국내 기관에서는 한국은 일본과 체질적으로 다름을 강조하면서 제2의 일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한국의 부동산시장이 견고해 일본과 같은 거품 붕괴가 오지 않는다는 믿음을 보탰다. 이런 항변이 무색하게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결국 중국 제조업의 부상이 한국 수출의 발목을 잡으면서 핵심 산업의 급속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경제에서 수출의 둔화는 제조업 구조조정과 내수 둔화를 동시에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고용·생산·투자·소비가 위축되는 복합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일본에서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됐던 저성장의 터널에 이제 한국 경제가 진입할 것이라는 경고등이 선명하게 깜빡거리고 있다.
올해 하반기부터 경기침체 속도가 가파르다. 3분기 성장률이 0.1%에 그치더니 4분기에도 0.5% 성장마저 위태롭다. 한국은행은 내년 1.9%·내후년 1.8% 성장을 전망하면서 한국 경제가 끝없는 저성장 터널로 진입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되던 시기와 흡사하다.
기본적으로 한국 경제는 장기 불황에 견딜 수 있는 체력 면에서 매우 열세다. 한국 제조업에 밀려 끝없이 추락한 일본 기업과 마찬가지로 중국 기업의 기세가 무섭게 한국 기업의 설 자리를 위축시키고 있다. 삽시간에 제로 혹은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 빠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나마 일본 기업은 원천 기술이라도 갖고 있지만 우리는 그마저도 열악해 궤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시간으로 엄중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의 삼류 정치가 무색할 정도로 한국의 사류 정치는 국가 역주행을 계속 재촉한다. 이제 한국의 일본화(Japanification)가 시간 문제라는 인식이 공론화되는 분위기다. 상당 기간 기업이 이를 저지하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버텼지만 이제 더 지탱할 힘이 달리는 것 같다. 한계에 도달했다.
무소불위의 정치 파행으로 그저 속수무책 국가 경제의 추락을 뒷짐 지고 볼 수밖에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일본이 그랬듯이, 그리고 유럽이 미국에 계속 뒤처지고 있듯이 우리도 이 부류에 진입해 긴 세월을 허송해야 하나 싶다. 정치에 함몰된 이런 국가 행태로는 일본보다 더 혹독한 세월을 살아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조선왕조의 몰락을 보듯 고삐 풀린 한국 정치의 말로를 보는 것 같다. 공들여 세운 탑이 아까울 뿐이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