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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헌식의 대고구리]
단군의 도읍 아사달이 만주에 있었을까?
성헌식 필진페이지 + 입력 2022-10-28 10:27:06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려역사저널 편집인
우리가 10월3일을 개천절로 지키고 있으나 사실 진짜 개천절은 1027일(음력 103일)이라고 할 수 있다물론 개천은 단군왕검이 아닌 1562년 이전 환웅의 신시 개천(神市開天)과 관련 있지만 같은 10월인지라 103일 개천절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단군왕검의 103일은 건방절(建邦節)이다.
  
그 근거는 단군세기개천 1565년 상월(10) 3일에 이르러 신인왕검(神人王儉)이 단목의 터에 자리를 잡자 백성들 모두가 임금으로 추대하니 단군왕검이라 했다. 신시의 옛 법도를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했다(建邦號朝鮮)”라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태백일사에는 신인 왕검이 백성의 신망을 크게 얻어 비왕이 되어 섭정한 지 24년 만에 웅씨의 왕이 전쟁하다가 붕어하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해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했다.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조선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단군왕검의 나라 세움은 요임금과 관련이 있다.
 
황제 헌원의 후손인 요임금이 당을 세웠다는 B.C. 2357년에 공교롭게도 단군왕검이 비왕에 봉해져 24년간 섭정했다가 웅씨의 왕이 전사해 왕검이 아사달에 이르니 온 백성들이 그를 천제의 아들로 추대해 나라 조선이 세워졌다. 단군왕검과 요임금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도지17장에 ()가 관문을 나가 무리를 모아 묘예(苗裔)를 쫓아냈는데, 묘예는 황궁씨의 후예였으며 그 땅은 유인씨의 고향이었다. 후대에 임검씨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부도를 비웠기에 그 기회를 이용해 습격하니 묘예가 마침내 동··북의 삼방으로 흩어졌으며, 요가 9주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符都)와 대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묘예는 당시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이고, 임검(壬儉)씨는 웅씨의 왕 즉 배달국의 마지막 환웅으로 보인다. 환웅이 부도를 비운 사이 요가 반란을 일으켜 차지하고는 당의 도읍으로 했다. 갑작스런 기습에 환웅이 붕어해 부도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비왕 왕검이 아사달에 이르니 온 백성이 추대해 나라 조선을 세운 것으로 종합 정리된다.
 
요임금의 도읍은 산서성 남부에 있는 임분시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웅씨 왕의 도읍이었던 부도도 그곳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아사달도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야 이 이야기가 성립될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왕검이 도읍으로 했던 아사달은 과연 어디였을까?
 
▲ 요의 도읍 평양은 산서남부 임분시, 포주는 순의 도읍. [필자 제공]
 
단군신화를 조작한 식민사학계는 역년 2천 년이 넘는 조선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기에 아사달이라는 도읍 대신에 사기 조선열전(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언급된 왕검성이 조선의 도읍지이고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지배의 역사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식민사학계의 반도사관을 매국사학이라고 강하게 질타하고 있는 대부분의 재야사학은 단군조선은 삼한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는데 단군이 직접 다스리는 진한의 강역은 만주 일대이고 도읍은 하얼빈, 마한의 강역은 한반도이고 도읍은 평양, 번한의 강역은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이고 도읍은 창려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 어떤 재야사학의 이상한 주장. [필자 제공]
 
그러면서 위만에게 속아 번조선을 빼앗긴 기준 왕이 하북성 창려에서 마한의 땅인 전라도 익산으로 도피해 한반도 남부에 남삼한이 형성되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다. 삼한 중 마한은 나중에 백제로, 진한은 훗날 신라로, 번한은 가야로 발전하는데 이건 매국사학인 반도사관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아울러 식민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위서(僞書) 운운하면서 그 내용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 반면에, 재야사학계는 환단고기를 민족의 성서(聖書)이며 거기 적힌 기록을 실사(實史)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래 환단고기의 기록을 어찌 해석할 것인가 묻고 싶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단군왕검은 제요도당(帝堯陶唐)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天王=단군)은 마침내 우순(虞舜=순임금)에게 명해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해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게 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달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왕검의 신하였던 순임금의 묘 앞에 세워진 석상. 중국 운성시에 있다. [필자 제공]
 
진한의 강역이라는 만주의 도읍 하얼빈에 있는 단군왕검이 산서성 남부가 활동무대였던 요임금과 서로 땅 다투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는 기록이 가능한 건지? 또 만주에 있는 단군왕검이 신하인 순을 보내 산서 남부에 있는 요임금을 쳤다는 기록이 가능한 이야기인지?
  
아울러 단군세기’ 8세 우서한 단군 조에 “4(B.C 1990, 신해) 단제께서 미복 차림으로 몰래 국경을 나서서 하()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크게 관제를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하나라의 도읍은 산서성 남단에 있는 안읍(安邑)이다. 어찌 만주에 있는 단군이 거기까지 가서 시찰할 수 있으리오! 이는 조선이 하나라와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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